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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21) 빌뱅이, 빌배, 달배, 별배

by 이무완 Mar 12. 2025

오두막 뒤 빌뱅이 언덕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으로 이름 난 권정생 선생님(1937~2007)이 쓴 책에 ≪빌뱅이 언덕≫도 있다. 책을 다시 읽다가 ‘빌뱅이’라는 땅이름이 궁금해졌다. 마침 ≪안동의 지명유래≫(안동민속박물관, 2002)가 있어 찾아 보니 ‘빌뱅이’는 ‘별배, 빌배’라는 이름으로 보인다.

      

탑마을 뒷산에 있는 산등성이며 주위의 산들보다 높아 정월 대보름 때는 달맞이로 동리 사람들이 모였으며, 별과 달을 먼저 볼 수 있다 하여 별배 또는 달배라고 불렀다고 한다.(330쪽)     


땅 모양새로 보면 달맞이하기에 안성맞춤한 곳이고 말고다. 별배와 빌배는 소리 다른, 같은 말이다. 경상도말에서 ‘별’은 곧잘 ‘빌’로 소리나는 까닭에 하늘에 있는 ‘별’로 볼 법도 하다. ≪빌뱅이 언덕≫의 ‘머리말을 대신하여’는 안상학 시인이 썼는데 여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빌뱅이 언덕과 꽃산만뎅이를 거느린 산의 이름은 빌배산이다. 백무산 시인은 이곳의 풍수를 강아지에 비유했다. 꽃산만뎅이는 머리 쪽이고 빌뱅이 언덕은 꼬리라 했다.(5쪽)      


누가 봐도 권정생 선생님이 살던 집은 빌뱅이 언덕 끝이자 곧 시작이다. 권정생 선생님은 1968년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살면서 새벽마다 종 치는 종지기였고 주일 학교 교사였다. ≪몽실언니≫ 계약금을 받아 빌뱅이 언덕 아래에 두 칸 오두막집을 짓고 2007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다. 집 뒤로 몇 걸음 오르면 언덕마루에 닿을 만큼 빌뱅이는 야트막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들과 마을이 한눈에 훤히 들어온다. 언덕 산등성이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꽃산만뎅이’다. “꼭대기 언저리에는 꽃산만뎅이라는 공동묘지가 있다. 꽃상여가 많이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빌뱅이 언덕, 4쪽)이라지만 내 보기에 ‘꽃산’이란 이름과 ‘공동묘지’를 엮어 지어낸 말이 아닐까 싶다. 들판 사이로 길게 삐져나온 산 모양새를 보고 흔히 ‘곶산’이라고 하다가 ‘꽃산’으로 된 땅이름이 제법 된다. 만뎅이는 산마루를 가리키는 경상도말이다. ‘만디ː이’라고도 한다. 표준말로 바꾸면 ‘꽃산 마루’다.      

위성지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별달, 빗달, 비탈 

다시 본줄기로 돌아와 ‘빌뱅이’라는 땅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자. ‘빌+뱅이’ 짜임으로 볼 수 있는데, ‘빌’부터 보자. ‘빌’은 비스듬한 땅, 곧 ‘비탈’을 가리킨다. 비탈은 빗달에서 왔다. ‘빗’에 높은 땅을 뜻하는 배달말 ‘’을 붙여 만든 말이다. ‘빗→ 빗달→ 비탈’로 바뀌면서 비스듬하니 언덕진 땅으로 되었다. 강원도나 경상도에서는 ‘비알, 비얄, 삐알’이라고 했다. ‘볋, 별, 벼로, 빌, 빗’ 따위가 모두 비슷한 뜻을 나타내는 친척말이다. 이 말이 땅이름에서는 ‘벼리, 벼루, 베리, 베르, 비랭이, 비랑, 벼락, 베틀’ 따위로 둔갑한다. 벼랑은 ‘볋’에 이름씨 뒷가지 ‘-앙’이 붙어 벼랑이 되는데 지역에 따라 ‘비렁’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비/빗/빛, 별, 벼루로 잘못 알아듣고 飛(날 ), 別(다를 ), 星( 성), 硯(벼루 연), 綱(벼리 강), 望( 망), 祝( 축), 雨( 우), 光( 광) 따위로 써서 맡밑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흐려놓는다.


곱이, 고배, 고뱅이

뒤엣말 ‘뱅이’는 배달말 ‘곱이’가 말밑이 아닐까 싶다. ‘곱이’는 ‘굽이’의 작은 말이다. 휘어져 고부러진 데를 가리킨다. 굽이굽이, 굽이돈다, 굽이진다, 곱이곱이 같은 말이 일가붙이 말이다. ‘굽이’가 [구비]로 소리나듯 ‘곱이’는 [고비]처럼 소리날 텐데 지역말에서는 [고배]로 소리바꿈이 일어난다. 경상도말 영향을 받은 동해나 삼척 지역말에 ‘고뱅이’란 말이 있다. ‘다릿고배ː이’, ‘다릿고뱅이’, ‘고비이’, ‘오금패ː이’라고도 한다. ‘다리+ㅅ+고배’, ‘오금+고패ː이’로 쪼개볼 수 있다. ‘다릿고배’가 ‘다릿고배ː이’로, 다시 ‘다릿고뱅이’나 ‘다릿고비이’로 바뀌어온 셈이다. 다리가 곱아지는 곳이니 ‘무릎’을 가리키는 지역말이다. ‘무르팍’이란 말도 같이 쓴다.

위성사진에서 보듯, 빌뱅이 언덕은 조탑마을에서 솔마골로 굽어 돌아가는 자리에 있다. 꽃산만뎅이에서 흘러온 산줄기 끄트머리에 권정생 선생님이 살던 집이 있다. 빌뱅이 언덕은 까끌막진 언덕이 아니라 느릿한 비탈이다. 곱아드는 자리에 있는 언덕(빌)이라고 처음엔 ‘빌고배’라고 하다가 [고] 소리가 트릿해지고 지역말 영향이 겹치면서 ‘빌(고)배이→ 빌배ː이→ 빌뱅이’처럼 바뀐 듯하다. 숱한 땅이름이 한자말로 바뀌었지만 ‘빌뱅이’라는 이름은 남았다. 권정생 선생님은 은 “살아 있는 사투리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정직한 말”(224쪽)이라고 했다.      

빌뱅이 언덕에서 본 권정생 생가


배달말 한입 더  

벼리 본디 물고기를 잡는 그물 코를 꿴 굵은 줄을 가리킨다. 이 줄을 잡아 당기거나 풀어서 그물을 치거나 거둔다. 여기서 뜻이 넓어져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졸가리 ‘줄거리’의 다른 말.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물의 군더더기를 다 떼어 버린 나머지의 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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