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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꼬댕이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22) 주치꼬댕이, 쥐치꼬댕이, 박달꼬댕이

by 이무완 Mar 15. 2025

“교육자는 결코 표준어에 대한 왜곡된 정당화로 학습자의 목소리를 빼앗아서는 안된다. 학습자의 목소리는 세계에서 자신의 경험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다. 학습자의 목소리를 희생시키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도날도 마세도 지음, 허준 옮김, 문해교육-파울로 프레이리의 글 읽기와 세계 읽기, 학이시습, 2014, 153쪽)

     

표준어 교육이 가로챈 목소리들

교육은 자신의 말로 자기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열어가는 일일 텐데 자기가 발 딛고 선 자리를 부끄러워하고 집에서 쓰는 말들을 멸시하게 가르치니 말이고 말로 일구어온 문화고 죄다 사라질 수밖에 없다. 말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면서 그 지역 사람들이 일구어 낸 문화의 기념비인데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전해지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고 만다. 

더욱이 우리 교육은 지역 말을 없애야 할 말, 써서는 안될 말로 공들여 금 밖으로 내몰아왔다. 잘 알다시피 표준어 뜻매김부터 사람 층하를 가른다. 처음엔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이다가 뒷날에 와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바뀌긴 했지만 ‘표준어’로 지껄어지 않는 사람은 졸지에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누가 무슨 구실로 지역 말에 공 들이고 품 들이겠나. 학교는 두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지역 말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배울 수 없다. 지역 말을 아는 사람들이 시나브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땅이름에 스민 지역 말

그런데 땅이름에 박힌 지역 말들은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는다. ≪동해시 지명지≫에 보면 ‘쥐치꼬댕이’, ‘주칫꼬댕이’라는 데가 있다.      


(평릉동) 초록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에 있는 봉우리로 현재 사격장의 끄트머리가 된다. 쥐치라는 풀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쥐치꼬댕이, 256쪽)     


(비천동) 복호등의 꼭대기에 해당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지형이 꿩이 뛰어가는 주치형(走稚形)으로 생긴 산등의 꼭대기라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주치라는 약재가 많이 난 곳의 꼭대기라는 데에서 부르는 지명으로 설명하기도 한다.(주칫꼬댕이, 144쪽)     


사라져가는 동해나 삼척 말에 꼬뎅이, 꼬댕이. 꼬디ː이, 꼭디기, 꼭디ː이 흔적이다.  모두 꼭대기를 가리킨다. 꼭대기를 달리 마리, 마래, 말기, 말랑, 말랭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도 표준어 ‘마루’에 잡아먹혀 몇몇 어른들 입에 겨우 남았다. 다행스럽게 꼬댕이는 땅이름에 들러붙은 까닭에 여지껏 살았다. 꼬댕이는 ‘꼭대기’를 가리키는 말이니 접어두고, 앞엣말 ‘쥐치’나 ‘주치’는 도무지 짐작하기 어렵다. ≪동해시 지명지≫는 둘다 ‘약으로 쓰는 풀’로 보았다. 곰취, 참취, 수리취라고 할 때처럼 ‘쥐취, 주취’라는 풀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이나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를 비롯한 배달말 사전이나 식물도감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어야 하지만 ‘쥐치’도 ‘주치’도 없다. 자연히 약으로 쓰는 풀이 많아서 생겨난 땅이름이란 설명도 미심쩍기 그지없다. 백 걸음 물러나 ‘쥐치’나 ‘주치’라는 풀이나 약재가 있다고 한들 풀 이름을 고개 이름으로 삼는 일은 없다. 에잇, 고사리재, 여뀌울, 쑥밭등, 조밭골, 백복령 같은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이 있으려나. 하지만 저들 이름은 소리가 어금지금한 풀이나 나무 이름을 딴 이름일 뿐 정말 그렇진 않다. 

풍수지리설을 끌어와 땅 생김새가 꿩이 내달리는 ‘주치’(달릴 走, 꿩 雉) 형세라서 붙은 땅이름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쥐치’나 ‘주치’에 찍어 붙인, 터무니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주치’의 다른 말 ‘박달’

내 보기에 ‘치’는 고개를 뜻하는 배달말 ‘티’를 받아적은 ‘치(峙)’다. 문제는 앞엣말 ‘쥐’나 ‘주’는 도대체 무어냐에 달렸다. 

내 짐작이지만 ‘주’나 ‘쥐’는 ‘’에서 온 말로 보인다. 땅이름에서 ‘’은 ‘박, 밭, 밖, 불, 발’ 따위로 소리가 달라진 다음 한자말로 받아적으면서 다시 한번 박(朴), 백(白·百), 배(培), 발(鉢·發), 불(不) 따위로 탈바꿈한다. 또 ‘밝다, 붉다, 발’이라는 뜻으로 새겨 明(밝을 명), 光(빛 광), 赤(붉을 적), 朱(붉을 주), 丹(붉을 단), 足(발 족) 같은 한자로 둔갑하기 일쑤다. 그래서 ‘주치’는 애초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티’라고 했는데 이 말이 ‘티→ 붉티→ 불치→ 주치(朱峙)→ 쥐치’로 바뀌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높은 재’로 볼 수 있다. 얼마나 높기에 고개냐 하겠지만 땅이름에서는 주위보다 높으면 고개도 되고 언덕배기도 된다. 

‘주치’와 비슷한 말로 ‘박달꼬댕이’가 있다. 박달재, 박달고개라고도 한다. 박달재는 청옥산과 두타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을 넘으면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로 든다. 

우리에게 ‘박달’은 꽤나 낯익은 말이다. 우리 겨레를 가리키는 말인 ‘배달민족’의 ‘배달’도 ‘박달’에서 왔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하는 묵은 대중가요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고 했다. 박달도령과 금봉이라는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반야월 씨가 노랫말로 적은 노래가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인데, 박달재 노래비까지 있어서 실제 있던 일처럼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곳 말고도 우리 땅 곳곳에서 ‘박달’이 있다. 대개 후박나무 박(朴) 자와 다다를 달(達) 자를 쓴다. 한자 뜻하고는 상관없이 소리만 빌려 쓴 말로 ‘(밝은)+(높다·산)’과 같은 짜임이다. ‘산’은 백두산(白頭山), 태백산(太白山), 함백산(咸白山), 소백산(小白山)처럼 ‘백(白)’ 자가 들어간 산이름으로 심심찮게 바뀐다.  

≪동해시 지명지≫는 ‘박달꼬댕이’를 “박달골의 끄트머리라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228쪽)이라고 봤지만, ‘산에 있는 고갯마루’라서 생겨난 이름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박달꼬댕이나 주치꼬댕이, 쥐치꼬댕이는 장소는 다르지만 산꼭대기나 고갯마루라는 뜻으로 쓴 땅이름이다.      


또 다른 꼬뎅이, 나발꼬뎅이

한편, ‘나발꼬뎅이’라는 고개도 있다. 삼척도호부 구실아치가 고을 수령을 맞으면서 나발 불던 고갯마루라고 전한다. 동해시에서 정선군 임계면으로 넘어가는 백봉령(780미터) 오르다가 남면재 아래쪽 복상골과 장밭골 사이에 있는 언덕이다. ≪동해시 지명지≫에 “옛날 고을 원이 가마를 타고 마을에서 임계 쪽으로 가거나, 임계 쪽에서 마을 쪽으로 오면 관원들이 이곳에 와서 그를 환송하거나 환영하기 위해 나팔을 불었다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158쪽)이라고 했지만 얼른 고개 끄덕여지는 설명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손 쳐도 이는 땅 모양은 조금도 살피지 않은 설명이기 때문이다. 땅이름을 살필 때 전해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말인데, 나발은 놋쇠로 위는 가늘고 끝은 펼쳐진 나팔꽃 모양으로 만든 관악기 아닌가. 나발처럼 쭉 내민 꼭대기라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남면재는 동해시 신흥동과 강릉시 옥계면의 살피에 있는 재로,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백봉령이 되고 북으로 가면 옥계면 남양리가 나온다. 얼굴(面)을 쑥 내민 고개라고 ‘남면치’라고 하지만 배달말로는 ‘내민치’나 ‘내민재’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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