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28) 덕만이재, 덕만이고개, 덕망재, 덩마니
※ 일러두기: ‘바람’처럼 붉고 굵은 글자는 아래아(ㆍ)를 'ㅏ’로 쓴 글자다.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살피를 가르는 경계 구실을 한다.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나타난다. 물론 오늘날엔 터널을 뚫어 길을 내는 까닭에 고갯길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데도 허다하다.
동해시 삼화동와 이기동 살피에 ‘덕만이재’라는 고개가 있다. ‘덕만’은 힘깨나 쓰는, 떡심이 좋고 우직한 사내 이름만 같다. 그런 사람 이름을 딴 고개인가 싶어 찾아보니 말밑은 없고 어디에 있던 고개인지만 말해놓았다.
내금곡에서 이기동 덕만이 마을로 가는 고개. 이 고개가 내금곡과 이기동의 경계를 이루는데, 지금은 길이 없어졌다. (삼화동 ‘덕만이재’ 설명, 동해시 지명지, 208쪽)
‘덕만이재’를 ‘덕망재’라고도 하는데, ≪동해시 지명지≫엔 “솔뫼기의 남쪽에 위치한 고개. 덕망(德望)은 한자어”(197쪽)라고 아주 짤막하게 말해놓았다.
땅이름에서 ‘덕’을 앞자리에 쓸 때는 흔히 ‘크다, 높다’는 뜻을 나타낸다. 큰말, 큰골, 큰고개 같은 이름을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덕(德), 인(仁), 한(韓, 漢, 閑)으로 적었다. 흔히 한자 덕(德)을 ‘덕 덕’으로, 인(仁)을 ‘어질 인으로 새기지만, ≪훈몽자회≫(1527)를 보면, 덕(德) 자를 ‘큰 덕’으로, 인(仁) 자를 ‘클 인’(‘ㅇ’은 반치음(ㅿ)으로 씀)으로 새겼다. ‘어질다’는 뜻도 있지만 현(賢) 자를 ‘어딜 현’으로 새기는 것과 견주면 조선 때만 해도 덕(德)이나 인(仁)은 ‘크다’가 더 주된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옛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오늘날 북한의 개성특별시 개풍군은 고구려 때 ‘덕물현’(德勿縣)이다가 신라 경덕왕(757년) 때 ‘덕수현(德水縣)’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는 ‘인물현(仁物縣)’이었다. 땅이름 바뀜을 보면 ‘덕물:덕수:인물’의 대응 관계인데, 이는 곧 ‘덕(德)=덕(德)=인(仁)’과 ‘물(勿)=수(水)=물(物)’의 대응이다. 덕(德)과 인(仁) 모두 ‘크다’는 뜻으로, 물(勿, 物)과 수(水)는 ‘물’이란 뜻으로 쓴 셈이다. 곧 덕물도 덕수도 인물도 모두 ‘큰 물’이라는 뜻으로 쓴 땅이름이다.
앞엣말 ‘덕(德)’을 ‘큰’으로 새기면 뒤엣말 ‘망(望)’은 무엇이란 말인가. ≪훈몽자회≫엔 ‘望(망)’을 ‘보롬’으로 새겼다. ‘큰 보롬?’ 여전히 아리송하다. ≪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신종원, 경인문화사, 2007)에 보면 정선군 도암면에 ‘望浪山(망랑산)’이 나오는데, 한글로는 ‘바랑산’(669쪽)으로 적었다. 망랑산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 경기가 열린 ‘발왕산’(1458m)이다. 발왕산은 망랑산, 바랑산 말고도 소울음산(所亐音山), 발음봉(鉢音峰/發音峰), 팔양산(八陽山) 같은 이름들이 있다. 그러면 발왕산을 망랑산, 바랑산으로 적었을까. 그 비밀은 배달말 땅이름을 한자 뜻으로, 한자 소리로, 한자 뜻과 소리를 섞어 빌려 적은 데 있다. 발왕산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을 톺아보면 ‘바람산’으로 모아진다.
모두 ‘바랑, 바름, 파랑, 부름(불음)’ 어슷한 소리로 뒤쳐지는데 ‘바람’(여기서 ‘ㅏ’는 아래아(ㆍ)임)을 나타낼 요량으로 한자를 빌려 적으면서 생겨난 이름들로 생각해봄 직하다. ‘ㅂ, ㅍ, ㅃ’은 모두 입술을 가볍게 열어 내는 소리인 까닭에 닮은 소리다. 또, 마파람, 휘파람에서 보듯 ‘ㅂ’이 ‘ㅍ’으로 소리 바꿈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내남없이 ‘바람’이라고 하지만, 옛사람들은 ‘바람’을 ‘바람’ 뿐 아니라 ‘보름, 부름’ 어슷한 소리로도 소리냈으리라. 지금도 제주 토박이들은 ‘바람’을 ‘불음’으로 소리낸다.
다시 본줄기로 돌아와 ‘덕망’에서 ‘망(望)’을 ≪훈몽자회≫(1527)에서는 ‘보롬’으로 새겼지만 ‘덕망재’에서 ‘망’은 ‘바람’을 나타내려고 빌려 쓴 한자다. 이렇게 보면 ‘덕망재’는 ‘큰바람재’다.
이쯤에서 이렇게 말하고픈 사람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왜 바람재인가, 고갯마루치고 바람 없는 곳이 있을까?” 과연 그렇다. 살랑살랑 불든 와릉와릉 불든 바람 부는 재라서 바람재라고 한다면 이 땅의 어느 고개든 ‘바람재’ 아닌가. 실제로 동해시 동회동에 ‘바람재’라는 자그마한 고개가 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재. 옛날 이 재를 넘어가 땔감나무를 해 왔는데 이 곳에서 부는 바람이 시원하여 생긴 이름이다. 객당의 뒷산이 되며, 지흥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한자로는 風吹峙(풍취치)로 적는다. 바람부리재를 줄여 바람재라 하는 수가 있다.(동회동 ‘바람재’, 동해시 지명지, 289쪽)
고갯마루에 서면 어디고 크든 작든 바람이 불고 말고다. 다만 같은 날이라도 재 밑보다 잿마루에 올라 섰을 때 바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재가 높고 골이 깊을수록 바람은 더 세차고 더 사납다.
그래서 말인데 바람이야 어디든 불겠지만, ‘거기 갔더니 유독 더 바람 불더라’ 하는 백성들 발견과 생각에서 ‘바람재’라는 땅이름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망랑, 발왕, 소울음, 발음, 팔양, 팔랑’ 같은 땅이름은 양반이나 구실아치들이 백성들이 불러준 ‘바람’을 제 귀에 들리는 대로 한자로 받아쓴 결과다. 글깨나 읽은 사람한테도 받아쓰기는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