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없이 조용히 진도빼는 국제학교 커리큘럼의 비밀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몰라~ 그냥 놀았어!”
초저학년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정말 놀기만 했을까 싶기도 하고, 피곤해서 말을 안 하려나 싶기도 했죠.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마음속에 의문이 자꾸 자라났습니다.
한국 교육과정을 밟고 자란 저에게는 교과서가 없는 영국 커리큘럼은 의문점 투성이었습니다.
“대체 우리 아이는 학교에서 뭘 배우고 있는 걸까?”
"요즘 수학은 뭘 배우고 있는거지? 영어는? 과학은?”
“교과서가 없으니 뭘 배우는지, 연습문제는 뭔지 알수가 있나?”
아이가 집에서 책을 읽거나 뭔가를 써서 진도가 보이는 공책도 없고,
학습지를 풀지도 않으니 점점 저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구름 속에 갇혀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불안감은 특히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갈때마다 증폭되어서 돌아왔죠.
"한국아이들은 은물이니 사고력 수학이니 난리인데.... 쟨 학교에서 뭐하고 오는거지?"
저를 답답하게 한 부분이 바로, ‘교과서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저에게 교과서란 곧 ‘진도표’였고,
단원별 ‘성취 여부를 판단할 기준’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아이는 국어책도 없고, 수학책도 없고, 과학책도 없습니다.
가방 안에는 딱히 눈에 띄는 학습 자료도 없었죠.
어떤 날은 색종이 하나가 전부였고,
어떤 날은 흙 묻은 양말과 모래가 가득한 신발만이 그날 배움의 흔적이었습니다.
저는 조금씩, 제가 배운 방식과 다른 영국식 교과과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식 교육에서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한 진도 방식이 아니라, 학습 목표를 중심으로 한 커리큘럼 체계를 따릅니다.
영국 교육부에서는 UK National Curriculum이라는 공식 문서를 통해 모든 학년에 걸쳐 ‘이 시기의 아이는 무엇을 배우고 어떤 역량을 길러야 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어요.
즉, 교과서는 없지만 커리큘럼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에 따라, 교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수업을 설계합니다.
예를 들어, ‘물질의 상태 변화(고체–액체–기체)’를 배우는 수업이 있다고 할 때,
-한 선생님은 물을 끓이는 실험을 보여줄 수도 있고,
-다른 선생님은 초콜릿을 녹이거나,
-얼음을 태양빛에 놓고 관찰하게 할 수도 있어요.
같은 목표 아래 다양한 접근이 가능한 것이지요.
수업의 틀은 유연하지만, 배움의 목표는 분명한 것, 그것이 바로 영국식 커리큘럼의 핵심입니다.
그럼 부모는 어떻게 아이의 배움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교과서가 없고, 수업 방식도 교사마다 다르니 학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뭘 배우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저는 처음 몇 년간, 아이 말만 믿고 추측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불안과 답답함은 아주 실질적인 것이었어요.
UK National Curriculum을 하나하나 직접 읽고, 아이 학년에 해당하는 과목별 학습 목표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글에 "UK National Curriculum"을 검색하면 과목별, 연령별로 정리된 자료를 바로 찾을 수 있어요.
https://www.gov.uk/national-curriculum
처음엔 영어로 된 이 공식 문서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아이를 이해하고 지지해주기 위해서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이 말만 믿다 결국 교사가 되기까지 저는 그렇게, 아이 학교의 교육 시스템을 하나하나 이해해 나가다, 결국엔 공부를 더 하게 되었고, 정식 교사 자격까지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부모로서의 불안이 시작이었고,
지금은 교사의 눈으로 왜 교과서가 없는지가 아닌,
없다는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정보의 투명성과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학교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학교는 매주 뉴스레터를 보내주고,
-어떤 학교는 매일 수업자료와 활동 사진을 OneNote, Seesaw 등에 업로드해주기도 하고,
-또 어떤 학교는 학기 초 전체 커리큘럼 개요를 제공하여
학부모가 미리 학습의 흐름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건 학교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이기도 합니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고 교사로서 현장에서 일하는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없다는 것이 배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사고와 탐색, 표현이 살아 있는 배움이라는 것.
교과서 속 문제를 줄 세우며 외우는 대신, 아이들은 직접 탐색하고, 경험하고, 스스로 표현해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단순한 지식 이상으로,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숨어 있습니다.
교과서 없이 아이의 배움을 따라가려면 단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학교와의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에요.
매일은 어렵더라도,
주간 뉴스레터, 학기 커리큘럼 맵은 늘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교과서’라는 눈에 보이는 기준은 없지만,
우리 아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기 위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야말로 교과서 이상의 힘이 되어줄 거라고 믿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영국 커리큘럼에서 말하는 학업 성취 수준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학기 말 리포트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실제 사례를 곁들여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부모의 눈으로, 교사의 경험으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