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후 집주인에게 날아간 고소장.
정말 어려운 이사를 했다. 급히 집을 내놓고 2주 만에 임차인을 구하고, 자취할 때부터 근 16년 간 모으고 사용했던 소중한 살림과 가구들을 처분했다. 떳떳한 이사라면 이삿짐센터를 불러 한번에 포장이사를 하면 그만이지만, 서로 헤어지는 마당에 그 조차 사치였다. 그는 서울에 남기로 했다. 본가로 돌아가기로 한 나는 옷가지와 강아지 용품들, 책 정도만 택배로 붙였다. 물건 하나하나 모두 정이 들어서 정리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한 사람 때문에 왜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다 버려야 하나, 왜 내가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도, 그냥 얼른 떠나고만 싶어졌다. 이제 한 마리만 남은 반려견을 데리고.
이렇게 급하게 이사를 결정한 건, 그렇다. 모두 돈 때문이다. 그간 버티고 버티며 어떻게든 돈을 메꿔나갔지만, 더는 안 되는 한계에 봉착했다. 도박중독 전문의의 말에 따르면 도박중독자가 한 가정의 재정을 파탄 내는 데에 걸리는 기간이 평균 10년이라고 한다. 결혼한 지 만 10년 되는 해에 가정 내 모든 재정이 파탄 났으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당장 다음 달 대금들이 걱정인 상황에 치닫자 선택지가 없었다. 세 달 전에 이미 서류상 이혼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는 곳만 분리되면 우리는 영영 남남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울역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긴 연애를 포함해 장장 18년 만에 우리는 진짜 이별을 했다. 서로의 청춘을 공유했지만, 노년은 볼 수 없는 사이.
떠난 지 16년 만에 돌아온 본가는 낯설었다. 늘 시끌벅적했던 그곳엔 이제 엄마만 남아 있었다. 어느새 엄마는 늙어있었고, 해맑던 나는 상처를, 나의 어린 강아지는 노견이 되었다. 그간의 문제들에 휩쓸린 사이, 난 나를 잃었고 세월을 잃었으며 길을 잃었다. 낯선 생활에 적응보다도 지친 심신을 쉬고 싶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안에서 최소한의 생활만 하면서 내게 일어난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렇게 한숨 돌리려는 찰나,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집주인이었다. 집에 문제가 있나 걱정하며 받은 전화 너머 그녀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내 앞으로 고소장이 왔는데, 이거 뭐예요?”
이사 후 채 일주일이 지났을까. 소유주인 그녀에게 전 남편 앞으로 된 고소장이 날아왔다고 했다. 봉투를 개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가압류 관련 내용 같았다. 일주일 남짓한 얕은 평화가 다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 집을 어이없이 날린 터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내 명의로 계약했던 집이었다. 그 보증금은 친정에서 도와준 것이므로 그와는 관련 없는 돈이었다. 이미 보증금을 돌려받았지만 덜컥 겁이 난 나는 급히 본가로 전입신고를 했다.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구나, 놀란 심장을 쓸어내렸다. 대체 그는 밖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고 다닌 것일까. 또 고소인은 대체 누굴까.
결혼 전 각자 직장을 다닐 때, 적금을 들지 않는 그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없다한들 단돈 십만 원이라도 들 수 있는 건데, 그는 돈을 모은다는, 혹은 모았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경제관념을 알고 우려했었지만, 암만 그래도 결혼 후 책임감을 가지면 그가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수많은 신호를 나는 그렇게 흘려보냈다.
결혼 생활 동안 내가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소비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큰 불화를 부른다. 그 성향이 부모의 습관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부부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고착화된 소비습관은 또 하나의 가풍이다. 감당할 수 없는 소비습관을 가진 집안과의 결합은, 돈이 많은 친정을 뒀든, 본인이 암만 능력자라 하더라도 피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자 골퍼, 능력 있는 축구선수, 잘 나가는 여배우, 트롯 퀸카조차도 끝내 가족의 돈 문제로부터 지쳐 기브업 하는데, 한낱 내가 뭐라고 그들을 감당할 수가 있겠나. 애초에 밑 빠진 독에는 물을 부으면 안 된다. 물론 물을 부어봐야 독이 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가혹한 이 세상의 이치지만, 애초에 그런 헛수고조차 않는 현명한 분들도 많이 존재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못했고, 오랜 기간 그 문제 안에 갇혀 점점 자기 통제능력을 잃어가면서 표류하고 있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와 올바른 경제관념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모든 소비상황을 오픈했다. 한 달 식비, 적금, 강아지 적금, 주택청약, 나의 보험상황, 하다 못해 내가 쓰는 화장품 값까지도 모두 공유했다. 내가 먼저 투명하게 공개하면 차차 그도 변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끝내 이런 사태가 터지고야 말았다. 나는 이제야 그가 자신의 재정상황을 오픈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사실 처음 사업실패를 고백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상황을 내게 미리 설명한 뒤 위장이혼이라도 했다면 집이나마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지경이 될 때까지 연극을 해가며 손을 놓고 있었을까 하는. 그 이유를 이혼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의 고소장들을, 산더미 같은 빚을, 도박중독을, 시부모의 재정과 고질적인 건강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이 모든 문제가 아내이자 며느리인 내 턱끝을 향해 조여 오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 안에서 죄책감도 수없이 느꼈지만, 나는 오직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게 내가 그의 곁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깨닫게 된 진리다. 전지전능하신 신도 해결해 줄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추측건대, 수많은 송사가 그를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도박을 오픈하지 않은 그는 내게 모든 문제를 에둘러 말했지만, 언뜻 들어도 이럴 수는 없을 만한 가짓수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듯했다. 내가 모르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처벌들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알길 원하지 않는다.
집주인에게 고소장이 날아가고, 부랴부랴 본가로 전입신고를 한 뒤 나는 신용카드를 정지시켰다. 그간 그가 출퇴근 용도로 썼던 카드라서 혹시 살려뒀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그의 도박 사실을 몰랐던 나는 이제 정말 끝이겠지 생각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었다. 고된 생활 속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하나 남은 반려견에게 급작스러운 건강이상이 왔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 강아지와 함께 본가에 내려가 있는 상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뎠는데, 도저히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하늘이 나의 모든 걸 다 가져가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발병한 지 열흘 남짓되었을 때 나의 예쁜 강아지는 내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혼보다 더 허망했다. 한편으로는 너무 오래 아프지 않아 외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이제 나는 정말 혼자가 되어버렸다. 정을 줄 것이 다 사라져 버렸다. 하늘의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한 시간 동안 얻은 것은 모두 내려두고 가라고. 그래, 내 운명이 그렇다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슬프지만 그게 내 운명이라면.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반려견의 장례를 치르고 3일째 되던 날, 그의 도박중독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