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오도 Jan 30. 2024

이른 신고식

첫날부터 바보가 되었다


“초록불이다” 건너자.


낯선 타지에서 길을 건너는 것조차 생경하던 첫날이다. 영국 입성 초입부터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밤늦은 시간 도착 예정인 런던행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인해 딜레이 되었다. 예상하던 차악의 상황에 오히려 안심했다고 지금으로서 미화하겠다. 그 틈에 서둘러 숙소까지의 코스를 몇 차례 검색하고는 외우듯이 했다. 공항에서의 절차는 복잡함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인해 피곤해진 탓에 숙박비용을 아껴보고자 런던의 3 존 (zone3)에 위치한 Hanger Lane역 에어비앤비로 향하던 길은 조금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지하철역에 내려 나이트 버스로 환승하는 길에 보이던 횡단보도 빨간불 앞에서 발을 멈췄다. 양쪽에 캐리어를 낀 채 횡단보도 앞에서 금세 지루하게 느끼던 참이다. 태연하게 갈길 가던 아저씨가 지나가고 보니 초록불이었다. 여기서는 초록불도 그냥 바뀌는 게 아니다. 어른의 평균 시야 한참 아래에 위치한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 빨간불이 바뀌길 멍하니 기다렸다. 아무도 없는 새벽, 지나가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한참을 기다리다가 무단횡단을 했을 거다. ‘이곳에 정말 무지하게 왔구나’ 싶었다. 하다 못해 신호등 건너는 일부터 남이 도와줘야 하니 얼마나 막막해 보였겠는가. 그렇게 외지에 도착했다.


예정 시간보다 늦은 탓에 걸음을 재촉하지만 제자리 같았다. 새벽 한시쯤 숙소 근방에서 헤매다가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름이 아니라 길을 못 찾겠다고. 호스트 부부가 밖으로 나와 맞이해 주는데 무작정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새벽에 염치없이 주뼛거리며 남의 집 구경을 마치고 홍차까지 얻어 마신 뒤 침대에 누웠다. 시차 탓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데 이곳에 무턱대고 온 거 같아 앞으로의 기간에 막막함이 앞서 들었다.


어엿한 유학생이 되면서 신호등 버튼은 일도 아니게 됐다. 유학 생활이 지루해질 무렵이면 가족이나 친구들이 한 번씩 여행을 온다. 길을 건너며 자연스럽게 버튼을 누를 때면, 외국인 티를 벗어낸 거 같아 잘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은연중 낼 수 있어 보여주기 식으로도 좋다.


그리고 얼마 전 한국에서의 이야기다. 사거리 코너에 위치한 카페를 운영하며 많은 손님의 발걸음이 닿았다. 날이 좋으면 창문을 열어둔 채 영업하는데 문을 열어두면 소음은 덤이다. 한 외국인이 습관처럼 신호등 버튼을 누르고 기다린다. 인위적인 새소리인데 한국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향신호기 용도로 설치된다. 신호등 버튼을 누른 이유는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거나 필요에 의해 눌렀거나. 내 목격담에 의한 추측은 전자에 가깝다. 습관적으로 누르는 모양에 더 가까웠다. 이러나저러나 한국에서 음향신호기 버튼을 누르고 건너던 외국인이 영국에서의 첫날 신호등 앞에서 멀뚱히 서 있던 나보다는 빨리 길을 건넜던 건 틀림이 없다. 초록불이 들어오는 동시에 거리에 새소리가 출발신호를 알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


그 외국인은 언제 알아챌 수 있었을까. 그 후로 간혹 횡단보도에서 새소리가 울리면 ‘본연의 용도로 쓰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그때를 회상하며 미묘한 웃음을 지어본다.  

이전 01화 소매치기 천국, 그들이 판치는 세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