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친정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뭐하니? 놀러 올래? 나는 가고 싶기도, 가지 않고 싶기도 했다. 저녁 고민할 필요도 없고 애들 내버려 두고 쉴 수도 있지만 엄마의 쉴 새 없는 넋두리와 잔소리를 생각하니 선뜻 가겠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었고, 집에 오니 저녁시간이라 다음에 가겠다고 했다. 오후 내내 흙투성이가 돼서 뛰어놀고도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싸우고 있는 두 아이를 보니 역시 갔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의 마지막 챕터 ‘독’을 읽으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권혁란 작가는 제주에 있는 '혼자가 되는 집'으로 간다. "온전히 혼자가 되려고. "
작가는 90년대생 딸을 둔 60년대생 여자이다. 한 세대 위의 시선이 궁금했다. 치열한 시간을 버텨내고 아이들이 독립(이에 관한 책도 있다)을 한 후, 되돌아보는 여자의 삶은 어떨까.
엄마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까. 틀림없이 있었겠지. 그렇지만 작가처럼 "아기 키우던 젊은 엄마 시절, 혼자만의 시간을 얼마나 갈망해 왔는지는 다 잊었"을까. 작가는 '엄마에게도 한시적이나마 혼자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된다고 해서 엄마라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혼자일 수 있는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 내가 자식과의 굵고 질긴 끈을 먼저 놓지 않는다면.
(정말 탁월하다 생각되는) 제목처럼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이를 낳음으로써 여자에게는 오직 엄마로서의 삶만 주어진다. 일하지 않는 여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은 일이 아닌 것처럼 폄하된다. 그럼에도 사회에서는 여성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마치 ‘엄마’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엄마라는 프레임을 쓴 순간, 희생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일을 해서 미안한 엄마, 일하지 않아서 미안한 엄마로. 또는 슈퍼우먼으로, 현모양처로. 나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기도 하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아이의 엄마’가.
작가의 생각에 많이 공감했지만 그만큼 익숙한 내용, 익숙한 시선이 아쉽기도 했다. 이미 지나온 자에게 느껴지는 여유로움. ‘지금 너의 괴로움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지나갈 테니 너무 집착하지 마.’라는 말. 아이들에게는 부족한 엄마여서 미안한 마음이 느껴지는 문장들.
하지만 그래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한 말처럼,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책의 서문에 있는 문장을 옮긴다.
“엄마에게서 나오지 않은 생명은 없듯, 이 세상에 엄마가 주제이지 않은 이야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