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이로운 페미니즘
정리, 모든 여성들의 표어, 잡지의 넘쳐나는 조언, 시간을 아껴라, 이걸 해라, 저걸 해라, 그리고 저것도, 우리 시어머니처럼(내가 너라면 이런 식으로 했을 거다. 이게 훨씬 빠르거든.) 하지만 사실 그건 고통이나 괴로움 없이 최소한의 시간 안에 대부분의 일을 마치도록 스스로를 몰아넣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니까.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정리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서 저장해 둔 문장을 꺼내본다.
정리, 모든 여성들의 표어
'표어' 란 사회나 집단에 대해 어떤 의견이나 주장을 호소하거나 철저히 주지시키기 위하여 그 내용을 간결하고 호소력 있게 표현한 짧은 말을 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여성과 정리는 날 때부터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리는 여성들의 일이 아니다. 여성들의 일이라고 사회가 주장해온 일일뿐이다. 여자애는 깔끔해야지. 집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어야 아이들도 안정감을 느끼지.
정리라는 단 두 글자는 매년, 매 계절, 매일 나의 주위를 맴돈다. 일 년이 지나고 아이가 학년이 바뀌면 예전 교과서와 문제집을 정리한다. 다 풀지도 못한 문제집을 보며 한바탕 잔소리를 해댄다. 연필과 고장 난 샤프, 색연필, 사인펜이 섞여 가득 꽂혀있는 통을 부어 정리한다. 이제 책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책을 정리할 차례다. 그림책은 빼고 인물과 사회, 과학 위주의 책을 배치한다. 둘째에게는 또 다른 책이 필요하다. 계절이 바뀌면 옷장을 뒤집는다. 아이의 옷들. 작은 것과 올해 입을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한다. 작은 옷 중 깨끗한 옷은 따로 담아둔다. 이제 작아서 입지 못하는 옷은 재활용에 넣는다. 옷 먼지가 가득한 작은 옷방에서 아이 옷을 개고 있노라면 많이 컸다,라는 생각과 언제 이 짓을 그만둘 수 있을까,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교차한다. 그리고 매일, 해치워야 하는 집 정리.
정리는 그냥 되지 않는다.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분류- 공간 확보- 키 맞춰 (보기 좋게, 사용하기 좋게) 정렬하기.
쓰임을 따라 나눌 때에도 수많은 선택이 필요하다. 자주 쓰는 물건인가 아닌가, 어디서 사용하는 물건인가, 누구에게 필요한 물건인가, 버려도 되는 물건인가, 지금 버리면 다시 사야 하는 물건인가, 그냥 놔두는 게 나은가, 나중에 다시 사더라도 지금 버리는 게 나은가. 이제 어디에 놓을지 정하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번번이 어디 이거 하나 놓을 곳이 없겠나. 하며 덜컥 사고 만다. 그렇게 물건 때문에 돈도 쓰고, 근심(나의 근심!)도 하나 더 늘었다. 분류도 했고, 놓을 공간도 마련했다면 이제 진짜 정리의 시간이다. 세우는 게 나은지, 눕히는 게 나은지, 색깔별로 넣을지, 새것과 헌것을 구분해서 넣을지, 뒤쪽에 넣으면 못 찾는 게 아닐지...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뭔가 이상했다. 큰 아이 옷 정리, 책 정리, 책상 정리. 둘째 아이 장난감, 교구 정리, 거실 정리까지.
내가 고민하고 생각했던 건 정작 내가 쓸 물건이 아니었다. 아이가 이걸 쓸 건지, 쓰지 않을 건지. 쓴다면 자주 쓸 건지, 그럼 아이의 눈에 맞춰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아이와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서 정리를 해야 했다. 그건 모두 내 '몫'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편이 말했다.
"오늘 바빴어? 빨래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 그대로, 밥 그대로. 냉장고에 있는 반찬도 들여다보고 오래됐으면 정리 좀 하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의 가사노동은 늘 누군가의 평가대상이 된다. 오늘 아이 방 정리 점수는? 주방 정리 점수는? 저녁 요리 점수는? 아이가 학교 간 사이, 아이 방을 싹 정리해 놓으면 아이는 불만을 터트린다. 이거 버리면 안 되는 건데 엄마 왜 내 허락도 안 받고 버렸어? 주방 정리를 하면 남편은 내가 요리를 많이 하는데 주방도구를 다 넣어놔서 찾을 수가 없다고 투덜거린다. 이건 자주 쓰는 건데 왜 이렇게 구석에 넣어놨어? 아이와 남편은 물건을 찾을 때 나를 그렇게 불러댄다. 엄마가 정리했으니까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 줄자는 찾을 때마다 왜 없는 거야? 어디다 정리 해놨어?
답은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구역은 '스스로' 하면 된다. 남편이 요리를 많이 하면 주방 공간은 남편이 책임지면 된다. 각자 자기 방이 있으니 그곳만 정리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더 쌓이고 쌓여 나에게 다시 돌아올 거라는걸. 이사 후 일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작은방에 쌓이고 쌓인 먼지를 닦아내면서도 전혀 상쾌하지 않다. 오히려 나의 몸 한구석에 그 먼지가 차곡차곡 쌓여 나를 덮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