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브랜디, '그라파' 리뷰
<신과 함께>라는TV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메인 MC가 연예계 대표 주당 신동엽씨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제목은 '신동엽과 함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듯싶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신동엽을 포함한 여러 주당 연예인들이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아 각 상황에 맞는 '술과 안주'를 추천한다.
예를 들면, 평생을 몸 담아온 직장에서의 퇴직을 앞둔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술과 안주, 부산에서 프러포즈를 앞두고 있는 연인들에게 추천하는 술과 안주 등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상황에 자신만의 센스를 더한 아이디어를 선물한다.
한 시청자가 혼자만의 호캉스에 어울리는 술과 안주를 추천해달라는 사연을 보내왔다. 사연의 주인공은 종종 다녀오는 해외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재정돈하곤 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여행이 어려워지자 해외여행 대신 선택한 '혼캉스'에서 즐길 술이 필요했다.
사연은 들은 패널들은 각자 본인들만의 센스를 발휘하여 술과 안주를 추천했는데, 그중 신동엽씨의 추천 이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을 못 가게 된 사연 주인공의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기 위한 비책으로 '나를 위한 사치'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그라파Grappa
나를 위한 사치로운 술로 신동엽씨가 추천한 술은 바로 그라파Grappa다. 다른 패널들은 너무 비싸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신동엽씨는 백화점 식품관에서 10-20만 원이면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술이고, 이는 나를 위한 선물로 그리 높은 금액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날 방송에서는 결국 신동엽씨의 추천은 주인공의 선택을 받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대신 나의 선택을 받는 데는 성공했다! 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해있는 와인숍에 방문해서 가격이 적당한 그라파를 한 병 구입하고, 함께 먹을 치즈도 여러 개 구입했다.
이게 그 유명한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술이라 이거지.
그 맛이 궁금해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그라파와 함께 먹으려고 산 치즈와 하몽을 준비해서 그라파를 열었다. 처음 맛을 본 순간, 내가 기대했던 고급스럽고 묵직한 맛과는 달리, 내 평생 술에서 느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생소한 향과 단맛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마셔보자.
음, 이건 마치 포도를 껍질채 입 안에 넣은 다음, 치아와 혀의 스킬로 포도알을 분리해서 맛있게 먹고, 포도껍질에 남은 즙을 짜내기 위해 한번 더 씹었을 때의 향이다. 내가 경험해 본 그라파가 딱 한종류라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그라파는 포도 껍질을 씹었을 때의 향을 베이스로 하고 그 위에 자두향, 견과류 향이 열심히 따라오는 뉘앙스를 가진 생소하면서도 우아한 술이다.
그라파라는 술은 원래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드는 싸구려 술이었다가, 후에 이탈리아의 대형 양조회사들이 정제된 방법으로 그라파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고급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찌꺼기로 만든 술이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나를 위한 사치'에 어울리는 술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라파의 특별한 의미는 그라파를 나를 위한 사치에 충분히 걸맞은 술로 만들어 준다.
그라파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술과는 달리 독특한 맛이 있고 때로는 그 맛과 향이 매우 거칠기도 해서 사람마다 호불호가 생길 수 있을 만한 술이다. 내가 마셨던 그라파는 씁쓸한 포도 껍질 향 (아마도 포도 찌꺼기를 증류하기 때문에 이런 맛이 나는 것으로 생각된다.)에 시원한 민트향이 곁들여져 달콤 쌉쌀한 맛이었고, 초등학교 때 종종 씹었던 롯데껌 중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술이 지닌 생소한 맛은 나에게 전혀 고급스럽거나 사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위해 특별한 술을 샀다는 사실과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나의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날 '그라파'는 나를 위한 선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