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상자: 자판기

땀 흘린 후 최고의 맛

by 지현


요즈음은 많이 사라진 자판기. 예전에는 슈퍼 마켓 앞에도, 학교 근처에도, 역 안에도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자판기는 지금도 왕왕 보이는 캔음료나 병음료가 나오는 자판기가 아닌 커피와 코코아, 율무차 등 따뜻한 음료를 취급하는 자판기입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가운데에 외국인 남자와 여자가 행복하게 웃는 사진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카페가 많지도 않고, 카페 문화가 있지도 않던 시절 꽁꽁 언 몸을 녹이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입이 심심하거나, 조금 힘들어서 쉬어갈 시간이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 자판기입니다. 가격도 몇 백 원 안 할 정도로 저렴했고 커피도 블랙, 설탕, 프림 취향대로 골라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많이 이용하던 당시에 어렸던 저는 율무차나 코코아를 마셨었습니다. 가끔 어떤 곳들은 쑥이나 우유 등 조금 더 많은 선택지가 있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요 자판기가 가장 반가웠던 곳을 수영장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체육센터에서 주 3회 수영수업을 들었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열심히 수영을 하고, 샤워를 하고, 100원을 넣고 대강 말린 머리로 밖에 나오면 조금 출출해지고 약간은 으슬으슬했는데 그때, 이 자판기가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아이들이 마실 수 있는 것은 코코아, 율무차, 따뜻한 우유 이 세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동생은 항상 코코아를, 저는 항상 율무차를 마시곤 했습니다. 딱 종이컵 한 장 분량. 적지도 그렇다고 들고 다니면서 계속 홀짝일 정도로 많지도 않은 양이라 자판기 근처나 다른 층에서 홀짝이면서 따뜻하고 달달한 음료를 먹으면 저도 모르게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좋아하던 운동코스인 현충원에도 이 자판기가 있었는데요, 수영장처럼 많이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높은 곳까지 꽤나 올라갔을 때 엄마가 준 동전으로 한 잔씩 뽑아서 근처 벤치 같은 데에 앉아서 홀짝였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는 쑥메뉴도 있어서, 신기해서 몇 번 뽑아먹기도 했었습니다. 언젠가는, 엄마에게 가장 따뜻한 걸 주게 다며 마지막으로 뽑아야지~ 생각하다가 두 잔 째 뽑고 나서 물이 떨어진 건지 다 안된다고 뜨는 바람에 속상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따뜻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던 자판기. 요즈음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예전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던 감촉. 반환 레버를 돌리면 남은 동전이 떨어지던 모습. 그리고 운동하고 신나서 음료를 마시던 모든 장면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후에 학교 앞에는 슬러쉬 자판기가 생기기도 했고, 페트병이 들어간 자판기도 더 다양해졌고, 나중에는 과자까지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가 나와서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자판기'하고 떠올려보면 가장 많은 추억이 있는 것은 이 커피 자판기입니다. 여러분도 자판기를 좋아하셨나요?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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