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의 권리

by 이수진
#어른이 주고 싶은 권리, 아이가 받고 싶은 권리 #어린이의 권리

“심부름을 하면 다른 사람은 놀고 있는데 나는 움직이니까 내가 쉴 권리를 빼앗긴 것 같아.”
“쉬고 싶을 때 쉬는 권리가 있어야 돼."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조금 쉬는 게 내 권리야.”
- 어린이들의 대화 중 ‘쉼의 권리’에 대한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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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공부지만 어떤 책은 쉬는 거야.”




어떤 어른들은 말한다. “아이들은 좋겠다. 노는 게 일이니까.” 심지어 이런 말도 들었다. “어른들도 푹 쉴 수 있도록 방학이 필요해.”


나도 한 명의 어른으로서 이 말들이 왜 나왔는지 이해하며, 일부는 동의한다. 정말이지,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긴 방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좋겠다’라는 말이 귀에 걸린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마냥 ‘쉬고’, ‘노는 것’이 아니며, 때때로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쉬고 싶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 잠깐 멈춰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쉬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은지.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쉼의 권리에 관해 보여주는 반응은 어린이들의 일상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어린이라는 존재와 그 일상을 ‘놀고 있는 존재’, ‘아직 책임이 전혀 없는 존재’, 혹은 TV에 나오는 만화 캐릭터와 같이 여긴다면 “어린이에겐 쉴 권리가 있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매일 쉬고, 매일 노는 너희들에게 쉼은 권리가 아니라 그저 일상일 뿐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다.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하긴 했지만 의도는 같았다. “너희는 이미 ‘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니?”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척 바쁘다고 나에게 설명했다.


“그건 애기들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맞아요. 아주 애기들. 못 움직이는 애기들은 많이 자요. 내 동생은 하루 종~일 자요.”

“그러데 우리는 아기가 아니고 어린이라서 할 게 많아요.”


어린이들이 말하는 어린이의 일과를 함께 살펴보자.


더 자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일어나기. 양치하고 세수하기. 아침밥 먹고 옷 입기. 유치원에 와서 놀이하기. 선생님과 공부하기(노래, 동화, 미술 등 다양한 활동). 점심 먹고 양치하기. 바깥놀이하기. 방과후 활동하기. 학원가기. 자전거/킥보드 연습하기. 동생이랑 놀아주기. 씻기. 저녁 먹기. 자기 전에 동화책 10권 읽기. 한글 공부랑 숫자 공부하기. 영어 동요 듣기. 자기.


이 외에도 중간 중간 할머니 댁에도 가야하고 장보러 가는 엄마도 도와드려야하고, 태권도 승급을 위해 품세 연습까지 해야 한다며 한숨을 푹푹 쉬는 어린이도 있다. 아직 시간을 잘 읽지 못해서 “긴 바늘이 6에 가면 또 밥 먹어야 되고, 작은 바늘이 7에 가고 긴 바늘이 12에 가면 학습지 선생님이 와요.”하며 열성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부분 30분 단위로 일정이 빡빡해보여 듣고 있던 교사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면 유치원 일과도 그렇다.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곳이라고 하지만 도착해야하는 시간, 놀이 시간, 점심시간, 모이는 시간,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시간 등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곳이다. 규칙을 알고 지키는 법을 배울 나이이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니 당연하다. 아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최선을 다해 생활에 적응하고 참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쉴 틈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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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놀기만 하는 건 권리가 아니야.”




어린이들도 무작정 쉬고 싶다, 놀고 싶다고 우기지는 않는다.


어린이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때로 그것은 사회생활(어린이집, 유치원과 같은 기관생활, 학원, 종교단체 활동 등)이기도 하고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주어진 역할(동생 돌보기, 자기조절하기, 집안일 일부 돕기, 친인척과의 외식자리 등)이기도 하다. 어린이들도 나름대로의 지위를 유지하고 타인과 함께 사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않고 쉬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직무유기, 태만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들의 쉴 권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어린이의 삶이 지나치게 어른들의 요구에 의해, 혹은 지나친 책임부여로 인해 쉼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진 않은지 살펴야 할 것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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