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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블로프 Jul 02. 2021

무덤지기<1>

망선도로의 걸음


달이 위선적으로 떠있었다.



무덤지기는 비를 맞으며 한가지 만을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집 한켠에 걸린 한 민화에 적힌 문구였다. 해농이라는 자가 지었다는 그 글. 사내는 그것을 자신의 화두로 삼았다. 저잣거리를 지나며 마주하는 새된 눈초리와 조롱, 시뻘겋게 타오르는 태양아래 쉴 새 없이 흐르는 땀, 그리고 컴컴한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 이것들을 헤쳐나가며 사내는 다만 쉴새없이 화두를 중얼거렸다. 입으로든, 속으로든.



'마음은 사람의 생각을 만들어내고,


생각은 사람의 행동을 유발시키고


행동은 사람의 습관을 만든다.'


 두건으로 빗방울들이 스며든다. 이미 등짝이 흠뻑 젖었다. 머지않아 얼굴마저 젖은 종이 꼴이 나겠지. 사내는 왼손으로 거칠게 코와 입가를 매만지고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이제 머지않아 강물에 다다를 것이다. 사내는 오른손으로 관을 질질 끌며 생각했다. 등짝에는 삽을 매달았고, 왼손으로는 빗물로 인해 자꾸만 흐려지는 앞길을 치워나갔다.

 

 신발은 밑창이 다 닳았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진흙바닥을 밟아나갔다. 그의 걸음을 따라 사자(死者)는 관의 모습을 한 채 비틀거리며 따라왔다. 질척대며 사내의 무릎을 힘겹게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망자의 집착일 것이다. 관에 들어갈 적만 해도 얌전했던 것이 꼭, 마을을 떠날 때가 되면 항상 이런 꼴이었다. 결국 사내는 한계를 느꼈다. 관을 끌던 손에 쥐가 난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마저 그 관을 끌었다. 마침 한 나무가 눈 앞에 서있었다. 그는 그것의 그늘 아래로 자신의 몸뚱아리와 시체를 던지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빌어먹을, 그는 생각한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에 감각이 없다. 어떻게든 그 무딘 감각을 되살리려 관짝에 손을 마구 비벼댄다. 그것도 모잘라서 쾅쾅 쳐대자 겨우 말을 듣는 느낌이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를 놓지 못한 망자에 대한 일종의 항의였다. 적어도 죽었으면, 산 사람 쓸데없이 고생시키지 말라 이거다. 관 앞에 우뚝 일어선 그는 그 나무통을 향해 침을 뱉었다.


카악, 퉤



 그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푸른색 하늘은 금방 어두워져 불타버리고는 한 줌 재로 남을 것이다. 먹구름이 자욱하다 해도 태양의 불길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신세지고 있는 나무도 본래는 푸르게 빛났겠으나, 결국은 이렇게 어둠에 휩싸여 시커멓게 변했지 않은가. 그러나 하늘이 조금 시꺼멓다고 해서 파멸의 불길이 벌써 다가왔다고 하는 것은 오산이었다. 밤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 태양은 저 구름 뒤에서 자신의 화염을 쏘아대고 있을 것이며, 결국에는 그 시커먼 연기덩이마저도 모조리 태워버릴 것이다. 행여나 그 무자비한 태양이 자신의 얼굴마저 하얗게 불태워버릴까 하여, 그는 곧장 땅바닥을 쳐다보고선 두건을 콧등쪽으로 깊게 잡아당겼다. 그는 나무 등줄기에 기대앉아 자기가 오늘 뭘 했는지를 떠올렸다. 오늘 하루 내내 비를 맞은 탓에 머리가 무거웠지만, 그는 어떻게든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런 기억을 붙드는 것은 마치, 젊은 날의 꽃향기를 되살리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공허한 일이었다.



 그날 아침 그는 빵 한덩이와 달걀 두 알을 먹고 밖으로 나섰다. 무덤지기라는 직책상 그는 공무원 나리들의 명에 따라 마을 밖의 숲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500년 전부터 이루어진 관례였다. 그러나 뭘 모를 시절 그는 이를 부당하다고 여겨 삽을 허공에 휘두르며 관리들에게 대들었다. 결국 감옥에 갇혀 30일의 굶주림과 10일의 주먹질을 겪고 난 뒤 그는 도끼 한 자루와 빵덩이, 그리고 변변찮은 옷가지들만이 손에 들린채 산으로 쫓겨났다. 그의 재산은 몰수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특히 부모는 자식이 천한 일을 직업으로 택했다며 사내와 연을 끊었다. 그래도 자식의 정이라도 있었는지 매년 1천만원 만큼의 연금을 주기로 했으나 그것마저 끊기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나무를 하나하나 모아 어줍잖은 집을 만들었고, 나무를 하나하나 베어가며 자신을 경멸하는 세상을 혐오했다.



 여하튼 그는 숲길을 거쳐 인근 마을에 왔다. 동네 아이들이 자지러질듯 깔깔 웃어댔고 어머니들이 혀를 끌끌 차며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러나 시커먼 두건을 덮어 쓴 그는 그런 시선이든 소리든 별 개의치않았다. 단지 그는 관이 오늘따라 조금 더 무겁고 사과와 우유 한 컵을 먹고 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 할 뿐이었다. 마을 변방의 석조로 된 흰 저택으로 사내는 발길을 옮겼다. 의원네들과 망자의 유가족들이 그를 맞이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환자복을 입은 한 주검이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맞이했다기보다는, 적대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러니까 전장에서 총도 칼도 없이 적군을 맞이했을때, 아무 말도 못하고 단지 노려보기만 하는 병사들처럼 말이다. 몇몇은 심지어 코를 막기까지 했고 제빨리 관에 망자를 담는 그로부터 멀어졌다. 가까이 있으면 자기조차도, 그 칠흑같은 관속에 갇힐까 염려하는 것처럼. 관에 시체를 담은 그는 그 상자에 딸린 쇠사슬을 어깨에 매고는 다시 질질 끌고갔다. 딸인지 며느리인지 모를 인간이 사내와 망자를 향해 '더럽다'고 했고 거리를 다시 지날 떄에는 달걀과 토마토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그가 삽을 땅에 푹 꽂고 사방을 돌아보노라면, 사람들은 다만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는 아무일도 아닌 양 각자 자기 볼일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안락한 집에서 닭고기를 뜯는 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루는 태양의 열기에 타버리고서는 다시 달빛에 피어나는거야. 그들은 그 피어나는 생명들을 보지 못한채 밤을 보내겠지. 내가 굳이 태양을 피해서 밤에 시체를 묻는 이유도. 그들은 내가 왜 시체를 묻는지도 모를거야, 자신들이 왜 살아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혼잣말로 그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이니 실컷 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달이 서서히 베일을 벗었다. 그는 다시 그 관에 매달린 쇠사슬을 어깨에 들쳐맸다. 힘겨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망자는 말이 없었다. 어차피 달빛이 뜨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 입술을 오물조물 움직여가며 자신의 화두를 읊었다. 얼마나 읊었을까, 강물소리가 들렸고 그는 나루터지기의 움막을 볼 수 있었다. 오늘 밤은 거기서 묵기로 했다. 내일이 오고 비가 그쳐야 노인장이 배를 움직일 것이다. 사실 오늘 밤에 해치우고 싶지만, 그 노인네는 빗길을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늙고 매말랐다. 이상한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를 저을때만큼은 나보다도 기력이 넘쳐보이니.



 노인은 집 안에서 생선을 굽고 있었다. 두개는 불에 익어가고 있었고, 하나는 노인의 얼마 남지 않은 이빨에 짓잉겨나갔다. 노인은 그것을 뼈째 먹어가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어댔다. 노인의 피부에는 검버섯이 피어있고 머리는 새하얗게 새었다. 그의 촛불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뭘 그렇게 보고있어?"



 노인은 사내를 인식한 듯 고개를 돌리고선 팔을 휘휘 저었다. 들고온 시체덩이는 밖에 치우라는 것이었다. 그는 비가 몰아치는 밖으로 나가 아무렇게나 놓인 뗏목의 맞은편에 관을 내려놓았다. 구더기나 안꼬였으면, 하고 그는 혼잣말로 내뱉었다.



"오랜만이유, 노인장."



 노인은 대답 대신 생선을 사내에게 건넸다. 꼭꼭 잘 씹어 먹으라며 허공을 씹어대는 시늉을 했다. 사내는 받아들자마자 게눈깔 감추듯 허겁지겁 일용할 양식을 먹어치웠다. 뼈마저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요즘 벌이는 괜찮나?"



노인이 생선을 하나 또 건네며 물었다. 사내는 콧웃음을 치다가 양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노인은 허허 웃으며 생선을 다시 뜯기 시작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은 망토와 두건을 벗어 화로 위에 걸쳐놓았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양탄자를 꺼넨뒤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리 밖의 꼴이 사납시러워도 안에서는 체면을 차려야 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노인은 신문가지를 들고 와서는 움막 한켠에 놓인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요 근래 비만 내리니까 시팔."



"그러게요, 지난주에 마을에 크게 홍수가 났었는데, 뒤진놈들 꼴이 말이 아니더라고."



"재수 옴붙었구만. 물에 파묻혔으니 풍선처럼 팅팅 불었을거 아닌가벼"



노인은 바로 그 뉴스를 읽고 있었다. 신문에는 몇명이 죽었고 재산 피해는 얼마나 있었는지 적혀있었다. 누가 죽었고 다쳤는지는 사실 그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핵심은 바로 옆의 부고란에 있었다.



"권가가 죽었구만!"

 

그 노인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아는체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이가 오늘 끌고온 시체요"



노인은 코를 킁킁대고는 가느다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쩌다 죽었디야?"



"모르죠, 노인네가 죽은거야 다 뻔하지."



"아니 그라도 시체 꼴은 보고 만지고 잡고 했을것 아니여"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노인은 금방 이를 인지하고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사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가 손을 찬찬히 뗴고는 목에 걸린 가죽끈을 풀었다. 푸른 병모양의 목걸이었다.



"할아범!"



느닷없는 큰소리에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이...이잉."



"그 절구하고 물 좀 줘보슈."



"아니 뭣에 쓸랑고?"



 노인은 사내의 기묘한 행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막자사발에 꽃잎들과 빗물을 집어 넣더니 그것을 쿵쿵 찧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푸른 유리병에 담았다. 곧 방안에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 꽃은 어디서 났간?"



"받았수다."



"느이가? 아주 장가랑은 척을 진 줄 알았더만"



노인은 금방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손에 신문을 집었다. 아까와는 달리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는 킬킬 웃기만 했다. 노인은 괜스레 무안한지 정치란의 뉴스를 큰 소리로 읽는다. 다음달에 대선이 있는데 기호 1번은 어디 남쪽지방 출신이며 기호 2번은 유엔 대사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하긴 그놈이 그놈이제? 거 빨갱이 아가 되믄 큰일인디!"


"뭐 차피 머지않아 땅에 묻힐 아들 아니겄소... 노인네들끼리 망령 들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지..."



노인은 푸흐흐 웃었다. 사내는 움막 귀퉁이에 자리를 펴고 노인을 등진채 누웠다. 노인도 가만히 신문을 읽다가 그 글자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었다.



노인은 사내의 맨발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러나 사내는 전부터 이미 깨어있었다. 단지 태양을 홀로 마주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사내가 망토와 겉옷을 차려입는 동안 노인은 선반에서 주전자와 갈색 가루들이 든 양철 통과 컵 두개를 꺼냈다. 커피였다. 노인에겐 아침 식사로 커피 한잔이 적절했다. 어제는 생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니글니글 했다. 그 기름발린 비늘들이 속에서 꾸물대는 것이 혀 끝까지 전해져 왔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그는 뜨거운 물에 커피를 우려냈다. 후루룩 들이키자 어느정도 가라앉는다. 남자도 한모금 마신다. 어젯밤의 빗물세례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정신 상태가 또렷해진다.



 노인이 돛대를 들고 나올 동안 사내는 관을 배에 실었다. 배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망자 한명과 산자 둘 옮기기에는 충분했다. 돛대를 꽂고, 돛을 펴고 노를 서너번 젓자 배가 기우뚱 거리며 움직인다. 밤사이 물이 많이 불었지만 빗방울은 이제 좁쌀만한 크기가 되어 이따금씩 얼굴을 스칠 뿐이었다. 사내는 안개 낀 습지를 바라보았다. 강은 안개들의 차지였지만 노인은 오랜 벗들과 어우러져 길을 잘 헤쳐나갔다. 암초나 바위에 걸려 덜컹이긴 했지만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라디오가 있었으면 좋았을걸!'



노인이 대뜸 돌아보며 말했다. 푸념에 가까우면서도 은근히 사내의 답변을 기대하는 듯 했다.



'그딴건 뭐에 쓴다구요'



'뭐에 쓰다니!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있구..."



한참동안 노를 젓던 노인은 이제 자리에 걸터앉고서는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거 들어봐, 나가 소싯적엔 말여, 강에서 온갖 금은 보화가 든 상자를 찾았는데..."



사내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 이야기를 들어왔다. 대충 요약하자면 강을 거닐다가 보석이 잔뜩 든 궤짝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배에 실고 오다가 큰 바위에 부딪혀 재물을 잃은것은 물론이고 배까지 강물에 떠밀려가 목숨만 겨우 부지했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인생이 결국 무상한 것이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할것이니 같은 쓰잘데기 없는 망념들을 살이라고 계속 붙여나가는 것이었다. 사내는 이번에도 묵묵하게 그 이야기를 들어 나갔다. 이번에 노인이 내린 결론 및 교훈이라는 것은, 자기가 그래도 살아있으니 얼마나 복받은 것이냐는 거였다. 그러니까 사내가 매번 강가를 찾아와 이렇게 건너는 것도 자기 덕이라는 것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앉았네, 노인장 말고도 뱃사공이 얼마나 많은데"



"많구말구, 거 기렇지만서도 나만치 강과 가까운 양반이 있겠는가 말여"



실로 노인은 그 강과 가까웠다. 그 나루터는 대대로 한 가문이 지켜왔고, 노인은 한 평생을 그 강가에서 살았다. 강은 대체로 친절했다. 어머니같은 자비로 강은 그 사내에게 자기 가슴을 파고들 권리를 주었고 항상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기 가족들에게만 친절했지 다른 이들에게는 가차 없었다. 그 아들이 싣고온 그 보물상자를 그녀는 독기어린 손길로 침몰시켰고, 또 몇년전 상류가에서 도시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버리며 자신이 가슴으로 낳은 생명체들을 죽여대자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없이 바람과 손을 잡고 이들을 모조리 강바닥에 짓뭉개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벅차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계속 밀려올테고, 머지않아 그녀 역시 첨단 기술의 협박에 굴복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아이들은 쓰레기를 먹고 자라날 것이며 그녀 역시 쓰레기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적어도 자기 아들이 살아있을 동안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것을 꿈처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아들도 마찬가지로서, 결혼조차 하지 않고 노인은 평생동안 자기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떠나보낼 인간 자식을 그날도 축복했다. 노인의 진짜 어머니는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강가의 그 진부한 생활에 환멸을 느껴 영영 떠나버렸다. 노인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그 대신 죽어서도 섬길 어머니를 얻었다. 모자는 그렇게 하루 하루를 헤쳐나갔다.



강은 노인의 몇 안되는 친구인 사내를 좋아했다. 단순히 아들의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 사내가 망자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를 좋아했다. 몇년 전 그 도시 인간들을 질식시켜 죽였을때, 사내는 하류쪽으로 떠내려온 그 시체들을 하나하나 관에 담아 자신의 아들과 함께 옮겼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노여움을 풀길 바란다며 수선화들을 꺾어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이 아닌 인간의 오래간만의 호의에 당황하면서도, 그 이후로 평생 그를 축복해주었다. 사내는 그 축복에 고개 숙이며 강가의 쓰레기들을 모아 어디론가로 치웠고, 강은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만 할수 있던 그 말을 그 사내는 얼추 이해하는 듯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배가 다시 덜컹이기 시작했다. 곧 수많은 덩쿨 줄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새들이 등굽은 나무에 앉아 울어댔고 그 나무들은 기괴하게 뒤틀려서 하나의 아치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역시 강의 자식들이었지만, 어머니의 말을 도통 듣지 않는 탕아들이었다. 악어들이 쉭쉭대며 지나갔고 물고기들이 뱃전을 툭툭 쳐댔다. 숲이라는 아버지와 강이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들은 다만 노란빛 눈을 가느다라게 뜬 채 언제나 그렇듯 이 두 사내를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고요함을 방해한 이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동안의 덜컹거림 끝에 배는 습지를 벗어나 넓은 강가로 흘러갔다. 강물의 자식들은 결국 자신들의 고결함과 어머니의 부탁에 응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악어들은, 언젠가 이들이 총부리를 들이밀지도 모른다며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고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들은 수많은 이빨들로 송어와 연어들을 잘근 잘근 조각냈다. 언젠가 그 사내들과 뗏목도 으스러뜨릴 날을 고대하며. 탕아라고는 했으나, 그들이 어머니를 거역한 것에는 개인적인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이들은 다만 인간들은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는 자신들의 도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말에 거역하고 아버지의 말에 순응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어머니를 따르며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늪을 지나는 동안 사내와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노를 저으며 앞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는 편이 신상에 좋았다. 조금이라도 잡담을 하면, 저 수풀과 강물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가뜩이나 시체를 싣고 가기 때문에 이들은 수차례를 냄새를 맡은 악어들의 광기어린 입길질을 견뎌야 했다. 다행이도 이번에는 수풀쪽이 조용했다. 이들은 앞서 말했던 대로 인간과는 다르게 고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떄문이다. 많은 인간들이 자연의 구성원으로서 잊고사는 그 고결함 말이다.



다시 안개들이 그 둘을 맞이했다. 노인과 사내는 직감으로 그들의 목적지가 근저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차이가 있다면 노인은 강물의 울림으로, 사내는 바람이 전한 냄새로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곳은 마을의 온갖 쓰레기들이 묻힌 섬이였다. 그러나 여기 묻힌 것은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같은 시시한 것들이 아니라 쓰레기 취급을 받은 인간들이다.



대다수의 장의사들이 천대당했지만 특히 이 '망각의 섬', 그러니까 망선도로 망자들을 이끄는 이는 짐슴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기묘한 것은 마을에서 꼭 한명 씩 이 더러운 일을 자청해서 떠맡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역할놀이를 하듯 그 불쾌한 일을 떠맡은 자를 자연스레 혐오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전통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무덤지기를 두고 천한 자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이 망선도에 묻히는 자들은 사회에서 낙오된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의 입장에서 망자의 존재를 깔끔히 지워버리고 싶을 때 시체를 종종 망선도로 보냈다. 주로 거지나 비렁뱅이, 매춘부, 사형수들이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오늘처럼 마을의 유지들이나 저명한 인사들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약간의 더러운 이야기들이 섞여 있는데, 가령 연금을 타내기 위해 어미 아비를 죽인 졸부 아들이 그 시체를 치워달라며 부탁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망선도로 망자가 가면 사회에서는 '실종자'라는 딱지만 남고, 결국엔 흔적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쾌락살인마들도 토막낸 시체들을 무덤지기에게 맡겼다. 무덤지기는 아무 군말 없이 그런 사회의 쓰레기들을 치웠다. 정말 치워야 할 것들은 그대로 남겨두는 일이 잦았지만.



이를 두고 왜 시체를 굳이 묻느냐는 의문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태우거나 수장시키거나 하면 원혼이 평생 산자들을 따라다닐 것이라는 미신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한 데에는 실용적인 목적이 더 컸다. 사람을 수장시키거나 불태우거나 하면 하류가에 떠내려오든 연기를 내든 해서 꼭 사람들 사는 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망선도에 묻힌 자들은 마을에서 아예 잊혀지기 때문이었다. 그 망선도로 가는 배편은 현재까지는 노인의 나룻배를 제외하고는 전무했으며, 그나마도 무덤지기가 아닌 속인들이 끼어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불쾌한 일들이 꼭 생기곤 했다. 기선을 도입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지만 마을의 관료들은 돈핑계를 대며 미뤄왔다. 사실 그것을 도입할 동기도 없었다. 망선도는 사람을 묻고 잊어버리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서, 사람들은 굳이 그 곳을 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것이다. 이러한 무관심과 미신과 자연의 본의아닌 축복 덕분에 망선도는 쓰레기들을 묵묵히 받아내는 섬이 되었다.



조각배를 섬에 정박시키고 노인과 사내는 관을 내렸다. 아직 대낮이었다. 망자를 묻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시간이었다. 노인은 목을 가르렁 거리다가 가래 섞인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배꼬리에 놓인 큼직한 상자에서 낚시대를 꺼내고선 비늘에 미끼들을 하나 하나 꿰었다. 미꾸라지, 민물새우, 등등. 그 미끼들의 미간에 은색 뿔이 돋아났다. 그 은색 뿔에는, 시뻘건 핏물이 묻어나왔다. 노인은 낚시줄을 물쪽으로 던져놓은뒤 사내와 관이 있던 쪽으로 돌아와 팔을 연신 내저었다. 빨리 나뭇가지를 챙겨오라 이거다. 사내는 인근의 덤불에서 마른 가지를 가슴에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곧 불이 솟아났고 그 나뭇가지들을 활활 태웠다. 아직 낚시대에선 입질이 없었다.



"옘병할, 아주 사람 시체에 맛이 들려서 미꾸라지는 뵈이지도 않는가벼"



"그럼, 내가 굽하고 땅이 삶아주는데"



사내는 등짝에서 삽을 꺼내 옆에 꽂아놓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인장은 킬킬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이었으나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비는 안맞겠구먼!"



"고기나 빨리 잡혀야 쓸건데"



사내는 배가 고팠다. 혹시나 입질이나 있나 하여 배쪽으로 가보았다. 노인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어느새 낚시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노인네는 제빨리 그 나무대를 처들었다. 메기 두마리가 딸려왔다.



메기라고는 했으나 확실히 시체를 먹고 자란 놈은 달랐다. 더욱 질겼고 못생겼다. 그 못생긴 수염쟁이들은 사내를 향해 뭐라고 계속 씨부렁거렸다. 그러나 이들이 입술로 뭐라고 지껄이든 들릴 리가. 그 우물거리는 말은 노인이 뒤에서부터 머리까지 꼬챙이를 찍어버림으로서 멈췄다. 그러나 한놈은 징하게도 불에 익어가면서까지 입을 천천히 움직여 댔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차마 납득하지 못한 듯 했다.



사내와 노인은 이 두 메기를 흔적도 없이 먹어 치웠다. 이들은 배 안에 작은 망선도를 간직하는 듯 했다. 뼈, 눈알, 먹지 못할 것이 없었다. 다만 내장은 너무 비려서 일찌감찌 흐르는 물에 버려버렸다. 배를 어느정도 채우자 하늘이 붉어졌다. 태양에 의해 타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꼴을 두고 노을이라며 온갖 낭만을 노래한다. 병신들, 그게 누구 타죽는 건지는 하나도 모를거야, 사내는 생각했다.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뜨겁게 불타는 태양을 보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거 참 아름답구먼"



사내는 그런 노인의 단순한 감정을 싫어했다. 그게 뭔가,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다니. 

달이 투명하게 떴다. 아직은 푸른 베일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사내는 노인장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노인장"



"으응?"



"거 얼어죽지 말고 가만히 별들보고 계슈. 다녀올테니."



노인은 여태껏 쓰고있던 밀짚모자를 벗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등을 돌리고는 관을 끌고 언덕을 올랐다. 망자는 훨씬 가벼워져있었다.



무덤지기는 어느 한 사원에 도착했다. 망자를 묻기 전 행하는 의식이 있었다. 무덤지기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죽음은 믿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죽음을 믿지 않는 신이 있었다. 그는 거대한 사원의 문을 밀었다. 끼이익 하며 관과 사내가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이 생겼다. 그곳에는 칠흙같은 어둠이 있었으나, 어느새 달빛이 스며들어 사내의 앞길을 밝혀주었다.



달이 위선적으로 떠있었다.


무덤지기는 가만히 자신의 화두를 외웠다.



"마음은 사람의 생각을 만들지, 그리고 생각은 사람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사람의 습관을 만드는거야."

세 번 즈음 외웠을까 귀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떠나간 아들이 돌아오는구나.'



"그걸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사내는 제단의 중앙에 위치한 한 여인상 앞에 서있었다. 여인상은 위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고,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관을 오른켠에 내려놓은 채 동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그 여인과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저 그의 상상일 뿐이었다. 그 둘 사이에 한 옥색 청자가 놓여있다. 요강인지 꽃병인지 모를 기묘한 형상을 한 그 그릇 안에는 뼛가루와 잿가루 따위들이 어지러이 섞여있었다. 사내는 망토자락에 딸린 주머니에서 향 서너 대를 꺼내 그 청자에 꽂았다. 그리고는 두발치 떨어져서 가만히 서고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허리를 숙이고선 땅바닥을 향해 주문을 왼다. 그의 입술이 쉴새없이 움직이며 뭔가를 읊조려댔다. 사내는 눈에 흰자만 띄운채 한동안 그 염불외기에 열중이었다. 그 자신조차 정확히 뭘 말하는지 모르면서 말이다. 이따금씩 '옴'이라는 기묘한 음성의 말이 들려왔을 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자에 꽂힌 두 향에서 주황색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 불길은 여인의 쇄골에 걸린 목걸이로, 제단 양 끝에 놓인 성배들로, 그리고 사원 한가운데 걸린 거대한 등불로 퍼져나갔다. 어느새 온 사방이 그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세상을 경멸하는 사내가 유일하게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찬란한 빛은 5초를 채 못 견디고, 다시 음울한 무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향들이 타들어간 자리에서 연기들이 피어난다. 그 연기들은 사내의 오른켠에 놓인 관속으로 스며들더니, 이내 한 줄기 모양이 되어 어디론가로 나아갔다. 무덤지기는 쇠사슬을 어깨에 들쳐 매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연기는, 하얀 실덩이들은 사원 뒷편의 한 언덕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사내는 그 뱀 위에 삽을 꽂았고, 희멀건 덩어리들은 이리저리 몸부림치다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거 총각...여긴 어디요?"



사내는 한숨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관이 열려있었다. 어느 한 노파가 그의 앞에 서있다. 그녀의 손에는 못다마친 뜨개질거리가 들려있다. 망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단지 연기덩이들이 지독한 장난을 치는 것일 뿐이었다. 망자의 못다한 말을 들어달라며 쓸데없이 무덤지기의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당신은 죽었소"



노파는 무슨 소리냐는 듯 자신의 손과 가슴과 쭈글한 얼굴을 더듬거렸다. 사내는 그 꼴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다. 이곳에 모여드는 '쓰레기'들은 매번 그랬다. 차이가 있다면 이 노파는 사내에게 역정을 내며 대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긴 망선도요."



노파는 코에 걸린 안경을 고쳐썼다. 사실 그 안경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노인은 그것 없이도 잘 볼테니까.



"나가 왜 여기있수? 우리 해인이는!"



"당신은 죽었소."



노파는 망연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사내는 망토를 벗어 땅바닥에 깔았다. 노파보고 앉으라는 소리였다. 노파는 뜻밖의 호의에 당황하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그 위에 앉았다.



"자 노인네, 가기 전에 여기 왜 왔는지 말이나 해보슈. 적어도 말동무는 되드리지. 거 남편이라도 목졸라 죽였수?"



노파의 이름은 권여선. 박말자나 순녀같은 이름을 기대했던 사내는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노파는 본래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열세살 뒤로는 도시로 떠났다. 다시 이곳에 돌아오기까지는 50년이 흘렀고, 그 고향에서 8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노파는 국가의 성장기 시절 주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미싱공장의 다른 소녀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장녀로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수도권에 위치한 대학에서 루스카야어 (동북아시아의 한 국가) 학과를 전공했다. 그 뒤 그녀는 북방의 여러 지방들을 오가며 회사의 거래를 도왔고, 여러 남자들과 입을 맞추었으며, 그러다가 자기 회사 동료와 결혼해서 살았다. 30 초반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영락없는 가정 주부가 되어 아이를 낳고 키웠다. 남편은 두살 연상으로, 결혼 후에도 자주 해외 출장을 나갔다. 더 이상 자신이 애착을 가진 언어로 소통할 수 없게 된 그녀는 귀국때마다 남편이 가져오는 루스카야 문학들로 서러움을 뒤로했다. 그러나 남편의 자식들에게는 영어를 가르쳤다, 남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많이 읽었다. 공립교육을 불신하던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책을 읽혔다. 그러나 도시의 교육에 열을 올리는 대다수의 어머니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가정을 꾸리고 나서부터 차곡차곡 모아서 건설한 서재의 방문을 잠가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명망 높은 사립학교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냈으며, 자질구레한 집안일은 둘째 딸을 시켰다. 그러나 장녀라고 해서 집안일을 아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남몰래 뜨개질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어느새 크리스마스날 남매들과 자신들에게 스웨터와 목도리를 떠주며 제가 읽은 동화책을 낭랑하게 애기하는 딸을 사랑했고, 그녀 역시 어떤 간섭조차 하지 않으며 자신을 문학의 바다로 이끌어준 부모를 사랑했다.



행동가지들과 감성과 이성은 로맨스 소설들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가르쳐왔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속 에서 쉬이 부서져 버린다고 그녀가 14살때 입학한 남녀 공학의 기숙학교는 가르쳤다. 그곳의 작은 사회는 책만 읽는 여자를 경멸했다. 꾸미지도 않고서 꼿꼿하게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며, 날마다 선생에게 칭찬을 받는 그녀를 말이다. 그러나 혼자서 읽을때와는 달리 공기가 날카롭기는 했지만, 그녀는 별 탈없이 그 기숙학교를 졸업했다. 유일한 단짝이었던 미애처럼 실연을 겪지도 않았고, 그 미애의 건너건너 친구인 희정처럼 어두운 골목에서 강간을 당하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교실 구석에서 가만히 책상에 앉아 문제집만 풀던 그 더벅머리 남자얘처럼, 수능을 친 이후 빨랫줄에 목을 매지도 않았다.



 대학 시절은 조금 달랐을까, 남학우들과 교수들이 성가시기는 했다. 그들은 스노볼과 나폴레옹의(루스카야 혁명의 주요 인물들) 저서들을 거론하며 그녀가 열다섯부터 읽어온 루스카야 대 문호들의 숨결을 반동적 사상이라며 배척했다. 루스카야 과라면서도 이들은 문자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심지어 버나드 마르크스의 명저라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다가 공안과에 불려가기까지 했으며, 쓸데없이 4년동안 책만 읽는다며 그녀에게 쇠파이프와 '무정부주의 선언'을 권했다. 참다못한 그녀는 헬름홀츠의 '정부, 무정부주의, 공동체의 기원', 스노볼의 '가족관계와 테르미도르 반동'등 무정부주의 사상가들의 저서를 전부 독파해 머리에 무정부주의 밖에 든 것이 없는 얼간이들을 내쫓으려 애썼으나 헛수고였다. 그녀는 자기 주위의 남성들은 전부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과 다를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학생활 내내 이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가장 저질스러운 족속들이 꼬여들때도 있었다. 바로 술을 사주겠다는 남자들이었다. 잘생기고 못생기고 할 것 없이 전부 모텔에서 여자를 눕혀놓고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족속들이었다. 머리에 무정부주의만 든 남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민주화 혁명이 끝나고 출몰한 이들의 머릿속에는 포르노에 나올법한 여성들만이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추파를 받을 때마다 술을 못한다고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남자를 쳐낼때면 보드카나 코냑을 에머랄드빛 유리잔에 담아 죽 들이키는 의식을 행했다, 한 잔 뿐이기는 했지만.



단 한 번, 남자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학번과 학과, 얼굴까지 노파는 기억해 냈으나 이름만은 모른다고 말했다.



"눈은 똘망똘망하고 코는 날렵하고 아주 미남이 따로없었디야! 건디 얼굴값 못하구 기냥 시정잡배였제. 68학번, 건축과, 소주 깡다구를 세잔쯤 마셨을까, 그 개시키가 자기 사상을 설파하는기여"



그 사상이라는 것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술을 왕창 먹인 뒤 몸을 벗기고 그녀에게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진심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피가 역류하는듯했다고 노파는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사내가 물어보니 노파는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그때 술기운에 피가 뜨거웠었거덩"



그녀는 물고있던 담배를 남자의 정수리에 비벼 껐다고 했다. 충격받은 남자는 이후 3주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다시 그를 맞이했을때 그녀는 들고있던 커피를 얼굴에 쏟았다고 했다. 그 뒤로는 증발한 듯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아가 설탕으로 만들어진 모양이여, 아예 뜨거운 물에 녹아버린게제"



여자는 졸업 후 어느 철강회사에 취직했다. 그 뒤 해체를 앞둔 소비에트 연방을 돌아다니며 국책사업이라는 것을 도왔다. 그녀는 많은 루스카야 남자들과 잤다. 코레아인, 루소인, 타미르인, 등등. 블루셴코, 츠바르츠키, 테츠벳코브, 노파는 그 이름들을 자랑이라고 좔좔 외웠다. 기이한 것은 그때는 아이가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노파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분명 나중에 남자들이 그 아이를 낳았을거라고 노파는 킬킬댔다. 루스카야 남자들은 단순하지만 한국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순박하다고 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싶으면 술을 마시고 싶다고, 계약을 하고 싶으면 계약을 하고 싶다고, 그리고 섹스를 하고 싶으면 섹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적어도 자신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다고 노파는 회상했다. 그녀는 단지 그게 좋았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 회사 직원과 맺은 관계에서 얘를 낳았다. 어머니가 루스카야인인 혼혈아였다. 그러나 아이를 낳았을때 그녀는 자기가 낳은 딸이 그 혼혈아의 자식이 아님을 꺠닫았다. 그 핏덩이는 남편을 만나기 한달 전 크리스마스 날 잠깐 관계를 맺은 이반 페트로비치를 더 닮았던 것이다. 그러나 멍청한 남편의 유전자는 러시아와 한국의 그것이 적절하게 섞어져있었다. 그는 남은 평생동안 자기와 비슷하게 왼쪽 눈가에 점이 난 딸을 사랑했다.



"나는 그 얘를 평생 싫어했수. 내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었지."



사내는 코를 조금 훌쩍였다. 이제 이 여자가 어떻게 추락했고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얘기하겠구만, 그는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말없이 그 노파를 묻겠지. 그리고는 다시 강을 건널 것이다. 받은 보수금으로는 뭘 할까? 노인에게 라디오를 사주자. 우리 집에도 갖다놓자. 그 다음에는 연필을 사자. 가죽 노트도 사자. 노파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자. 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겠지만 이 업을 이어받을 자에게 나름 도움은 될지도 모른다. 근데 글은 왜 적는 거지? 노파는 쉴새없이 나불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연극의 2장이 끝나고 3장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얘를 낳기 시작한 순간 비극의 아리아가 연주된다. 노파의 말 역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발랄했던 전의 톤과는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는 자꾸만 아래로 쳐졌다.



루스카야 연방이 해체되기 전까지 부부는 빅투아르휴고 라는, 지금은 키에르케고르의 땅이 된 곳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잠시 업무차 그들은 토키오(작품의 주 무대인 콜레야 동쪽에 위치한 섬나라 하폰의 수도)로 갔다.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날, 시내 식당에서 라면을 먹던 그들은 자신들의 일터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았다. 왁스로 머리를 위로 넘기고 뿔테 안경을 쓴 앵커가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1991년 루스카야의 11개 공화국은 독립국가공동체에 참가할 것을 합의했으며"

그러니까 루스카야 연방이 붕괴되었다는 소리였다. 남편은 고등학교 시절 마을을 찾아온 하폰의 사업가들 덕에 하폰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그녀 역시 고등학교 제 2 외국어 과목과 부전공으로 하폰어를 택했기에 뉴스같은 것은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와, 멍한 기분이 퍼져나갔다. 결국 그렇게 되었구만, 그 둘은 가만히 마저 남은 면들을 후룩 후룩 떠먹었다. 식당 한켠에서 머리가 다 까진 양복 차림의 사내가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뭐라고 말해대고 있었다. 허 이것 큰일이구만, 그 남자는 부부가 거래처로 맞이한 경제부 관료부터 그저 이름만 들어본 정치인까지 뭐라뭐라 들먹이고 있었다. 그의 나무아미타불은



'허 이것 큰일이구만'



인 모양이었다. 이 사내는 승려임에 틀림없다. 부부는 이런 생각을 하며 키득거렸다.



남편은 그 회사에 계속 남았다. 회사의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파산하지는 않았다. 그 소련의 관료들이 연방 해체 이후에도 계속 각자의 공화국에서 일하고 있던 것이다. 그녀는 큰딸아이의 머리가 두꺼워지자 그대로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수도권 근저에 위치한 곳에서 아이를 키웠다. 아이는 셋을 낳았다. 7살 때 이사온 김지영은 루스카야어를 너무나도 빠르게 잊어갔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딸이 집안에서만은 러시아어를 쓰게 하려고 애썼다. 한글 대신 루스카야문자를 가르쳤으며, 간혹가다 딸이 한국말을 하면 아예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한때는 너무 화가 나서 루스카야어로 '니네 나라로 돌아가 이 빨갱이야'라며 볼기짝을 한참동안 때렸다. 그러나 10살짜리 아이를 붙잡고 그런 짓을 벌인 것을 깨닫자 김지영은 제빠르게 그 아이를 안아주었다. 겉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연신 중얼거렸다. 실상은 그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이 자기 본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노파는 이런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했다. 왜 조금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하고.



결혼 이후 그녀는 20대의 찬란함을 하나 하나 잃어갔다. 루스카야에서 지낼 때는 남편의 어머니가 김지영을 보살펴주었고, 그 덕에 권여선은 그럭저럭 루스카야 연방이 해체된 하늘 아래서도 그럭저럭 일을 할 수 있었다. 일은 그녀가 모국으로 돌아오며 꼬여갔다.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저 아줌마일 뿐이었다. 거친 콜레야어를 하는 아줌마였다. 아이는 제대로 한국말을 하지 못하며, 어미 역시 불쾌한 억양의 한국어를 내뱉는다. 그 꼴이 마치 벌레가 주둥이를 꼬물락 대는것 같다며 사람들은 그녀를 맘충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화도 냈고, 따지기도 했고, 실랑이도 벌였지만 기운이 예전같지 않았다. 세번의 출산을 거치며 그녀는 약해갔고, 정신도 점점 이상해져갔다. 자국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아예 일을 잃었다. 그저 어항의 금붕어마냥 뻐끔거리며 자신의 운명은 하나도 바꾸지 못한채 자기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불만을 털어놓을 친구조차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자국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루스카야 문호들의 숨결 아래 지냈다. 남편은 쿠드밀랴 게르마니아의 책들을 가져왔다. 바네치카, 클로버의 여왕, 전쟁과 벌, 등등. 그녀는 바네치카가 그랬듯 자식들을 재우기만 하면 그 책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바네치카는 서른번이 넘도록 읽었다. 그녀는 자신이 바네치카와 너무나도 닮았다고 느꼈다. 두 여자는 똑같이 루스카야 대문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남편은 어디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바네치카에게는 야샤라는,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여자가 있었지만, 권여선에게는 자기가 불륜을 저지른 흔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반 페트로비치. 그저 심심풀이로 술집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 사람. 자신의 마지막 20대를 장식한 남자. 그러나 그 돌아올 수 없는 흔적이 김지영의 모습을 한채 덩그러니 자기 집에 있다. 김지영에게 루스카야어를 강요한 것은 자신의 그 20대를 추억하기 위해서였다. 공교롭게도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그녀는, 그것도 바네치카를 너무 많이 읽은 그녀는 결국 자신의 일곱살 난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이 자라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를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미친생각이라며 떨쳐버리던 생각이 보드카와 코냑을 마시며 분명해져갔다. 결국 권여선은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을 술만 마시면 때리기 시작했다.



김지영은 장녀였고, 동생과는 세살 터울이었다. 남동생과는 다섯살 터울이었다. 그러나 김지영이, 엄마가 가끔씩 얘들을 다 재워놓고 담배를 태우며 보드카를 담는 그 유리잔의 에머랄드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두 동생은 그것과 엄마의 갈색 눈동자가 잘 섞인 회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피부색도 김지영 쪽이 훨씬 하얬고, 머리색도 금발에 가까웠다. 김지영은 자라나면서 동생이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은 아버지였다. 한달에 한번씩 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애써 러시아어를 쓰려는 엄마를 다른쪽 방으로 내쫓고는 김지영에게 오르골, 박영리의 토지 전집, 그리고 보랏빛 보석 목걸이를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는 모두 그녀의 어머니에게 들켰다.



김지영이 15살이 되자 권여선의 표독스러움은 더해갔다. 자기 딸이 받은 그 선물들을 불륜의 흔적 취급하던 것이다. 그 목걸이를 죄다 끊어버리고는 베란다로 던졌으며, 토지는 불태워버렸고 오르골은 바닥에 내던져 박살을 내놨다. 17살이 되고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어 교복을 사달라고 하자, 마침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있던 권여선은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이자 남편의 내연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탁자에 쾅쾅 내리쳤다. 이 미친년이 어딜 집안에 기어들어오느냐고. 중등교육 다 끝마쳐줬으면 그만이지 어딜 돈을 바라느냐고, 러시아어도 지 아버지도 본분도 제대로 모르는 년이 어딜 남의 집에 와서 행패냐고, 딸이 탁자에 축 늘어지자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식칼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김지영의 정수리를 칼 등으로 툭툭 쳤는데,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은 앞머리는 아무렇게나 헝끄러뜨린채 일어나서 자기 엄마의 그 칼을 든 손을 칵 꺠물고는 밖으로 뛰쳐 나갔다. 김지영의 어머니는 선혈이 낭자한 자신의 오른 팔뚝을 보며 웃었다가 울었다 했다. 김지영의 동생들은 외가댁에 가 있었다. 김지영은 식칼을 땅바닥에 쾅 던져놓고는 절규하듯 외쳤다.



"сука(썅년)!!!!!!!!!!!"



김지영는 달리 두 동생은 유복하게 자라왔다.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에 비할 데 없이 너무나도 상냥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 줄 정도였다. 단지 평소에 큰누나, 큰언니를 독기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그녀에게 러시아어를 쓸 것을 강요하고, 술을 마시면 아예 사람이 바뀌어 누나의 좁디 좁은 방으로 들어가선 거실로 머리채를 끌고 온다는 것이 달랐다. 이들은 묵묵히 배게로 귀를 틀어막고 누나, 언니의 비명을 견뎠다. 어머니도 그때는 그 둘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느날엔가, 막내 아들이 유치원에서 장기자랑을 했을때 엄마가 오지 않았다고 싫증을 부린 날이 있었다. 엄마는 미안하다면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치킨너겟을 해주었다. 당시 티비 광고를 보고서 용가리 치킨 하고 노래를 불러댔던 그였기에 남동생은 행복한 식사를 하고 잠에 들었다. 새벽에 그는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큰누나의 비명소리에 깼는데, 어머니가 평소와는 달리 주먹이 아닌 각목으로 누나의 등을 향해 후려치고 있었다. 남동생은 그 이후로 다시는 투정을 부리지 않았고, 이후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되었다.



그 둘의 어머니는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에게는 어떤 것도 잘해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김지영의 하나뿐인 여동생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6번째 자기 생일날엔 몇십만원은 하는 바비 인형을 그대로 사줬고, 4살짜리 동생한테는 당시 유명한 축구 선수가 선전하는 축구화를 사주었으면서 큰언니에게는 오히려 밥을 굶기던 것이었다. 그래서 8월 23일이 되었을때 김지영의 여동생 김지서는 하나밖에 없는 언니에게 민들레 꽃을 꺾어다 주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운 것이었다. 김지영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그 광경은 어머니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날 밤 김지서는 언니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거실로 나와보니 엄마는 식탁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현관에는 옷가지들이 널브러져있었다. 속옷가지, 반팔, 파자마, 모두 언니의 것이었다. 울음소리는 문 밖에서 났다. 현관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엄마는 김지서를 향해 방긋 웃어보이며 물었다.



"우리 지서 깼어?"



지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런 지서를 따스하게 안아서 침대에 재우고는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지서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밖에서는 민들레 어쩌고 하는 소리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과, 주먹질하는 소리가 났다. 이반 페트로비치! 그것만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김지서는 그것이 일종의 종교의식일 것이라고 믿었다. 김지서는 이후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었다.



김지서와, 그녀의 남동생과, 권여선은 자신들이 행복한 것이 저 이반 페트로비치를 죽도록 때렸기 때문이라는 종교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할머니댁에서 집으로 돌아왔을때, 누나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을때 이들은 김지영이 자신들을 위해 순교했음을 믿었다. 식탁에는 핏자국이 없었지만 어딘가 둥글게 눌린 자국을 통해 남은 두 동생들은 큰누나, 큰 언니가 탁자에 못박혀 순교했음을 믿었다. 엄마는 이후 독실한 불교도가 되었고 술도 끊었으며, 한밤중의 불쾌한 종교의식도 하지 않았다. 한달간의 평화는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 의해 깨졌다. 자기 큰딸이 계속 맞아온 것을 짐작하던 그는 김지영이 사라진데에 오열하며 아내를 집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친가로 내쫓긴 김지영이 법원에 이혼 도장을 찍으러 출석하러 갈때, 그녀는 마침 콜레야에 와있던 남편의 남동생으로부터 짧은 연락을 받았다. 남편이 어느 음주운전자가 몰고가던 차에 치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김지서와, 김지서의 남동생이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해 누구보다도 크게 울어댔다. 그 뒤로는 다시 술에 입을 대지 않았고 남은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자식들은 자취를 하겠다며 거금의 돈을 요구했고, 그녀는 남편의 상속분을 전부 두 남매에게 바쳤다.



"당신은 미친년이오"



사내는 노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노파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뭔가 항변하려는 듯도 했지만 무덤지기한테 그런 것은 알 바가 아니었다.

"괜히 쓰레기가 아닌게지."



이후 그녀는 얼마간 수녀같은 생활을 지속했다. 수와니 근교의 작은 빌라로 이사했으며, 한달에 40만원을 쓰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요가로 하루를 시작하고, 8시경에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 몇권을 골라 그것을 쉴새없이 읽었다. 뭘 읽었는지 노파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글자가 있었기에 그것을 읽었고, 그러다가 다섯시가 되면 책을 빌려가서 마저 읽었다. 밥은 왠만하면 직접 해먹었다. 아무렇게나 해먹던 주부시절과는 달리 그녀는 맛을 제대로 내는데 주력했다. 그녀의 간장게장은 특히나 맛이 있었는데, 살을 쪽쪽 빨다가 혀를 깨물 정도였다. 둘째 딸과 막내 아들에게는 집 밖으로 나간 뒤로 한번도 연락이 없었다. 10년동안이나 연락이 없자 그녀는 집착을 끊겠답시고 핸드폰과 컴퓨터를 끊었다. 카톡에는 전혀 대답을 주지 않으며, 전화 번호는 바뀌었는지 이상한 곳으로만 갔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녀는 길을 잃었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가물가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리저리 헤메다가 어느 한 거리로 들어섰다. 그 위편에 걸린 현수막을 보지 못한 채였다.



<초,중학생, 노약자 출입 엄금>



거리에는 왠 여자들이 더덕더덕 있었다. 한평짜리 칸막이로 된 방에서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 했다. 그 핑크색, 하얀색, 주황색 원피스를 입고 유리창 뒤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잡는 양이 마치 인형 가게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침 그녀의 옆으로 양복을 입은 취객들이 지나갔고, 그 상품들은 거리로 나와 남자들의 손을 하나 둘 붙들고 그 진열장 뒤의 검은 방으로 데려갔다. 권여선은 몸을 파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들어봤지만, 그것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충격 받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창녀들 중 하얀색 원피스에, 단발에, 진한 화장을 한 여성이 이반 페트로 비치를 닮았기 때문이다 이었다.



"지영아!!!"



그 푸른 눈의 여자는 한 취객의 팔을 잡아 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자, 손을 놓고 권여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김지영은 구두조차 내던지고 어디론가로 냅다 뛰었다. 얼굴에는 공포감이 어려있었다.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 팔을 벌리고 그 딸을 쫓았다. 그녀는, 그녀의 딸은 자기 엄마가 목을 조르러 온다고 생각했으리라. 운명의 수레바퀴는, 제빠르게 달리던 검은색 페라리는 그 김지영을 산산조각냈다. 길바닥에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진 자기 딸과 유유히 제 갈길을 가는 페라리를 보며 어머니는 절규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어머니와 딸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 검찰에 항거한답시고 피켓을 들다가, 보수 논객이니 진보 사회운동간지 뭔지한테 홀려서 남은 재산이고 육신이고 뭐고 홀라당 바쳤거나, 둘 다거나 해서 도시에 환멸을 느껴서 50년 뒤에 자기 마을로 돌아온게지. 그때면 부모고 뭐고 다 뒤졌을테고, 장녀라고 해서 저택정도는 상속받았을 테고, 그 상속을 받은 저택이 댁이 뒤진 그 흰색 집이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무덤지기의 마을에 돌아오게 되었다.



"쓰레기, 뭐 변명할 거리라도 있수? 아님 이게 그저 3막일 뿐인가? 사, 오 막이 또 있어?"



시골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녀의 생활이 별반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다리가 전처럼 말을 안듣고 머리에 종양이 생겼다고 해서 의사들이 오갔을 뿐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여동생과 남동생이 해준 호의였다. 그 둘을 보며 권여선은 부럽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은 서울의 병원장을 맡고 있었고 여동생은 어느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었다. 둘은 평범한 아내와 남편을 맞았고, 아이는 둘만 낳았으며, 별 굴곡 없는 삶을 살았다. 배우자들은 둘다 정정했고, 그 둘은 적어도 한 아이를 죽도록 매질하지도 않았다. 그 둘은 언니가 서울에서 무슨 삶을 살았는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긴 했지만, 오직 둘쨰 동생만이 몇달에 한번 꼴로 언니가 있는 곳에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도서관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와, 남동생이 조금 가꾼 서재에서 책들을 빼다 읽었으며, 웰시코기 두마리를 키웠고, 정원을 가꾸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손만 닿으면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난다며 칭찬했다. 당연히 그 두 손이 자기 딸을 죽인 손이란 건 몰랐다.



동네에서 산지 3년이 지났을까, 노파의 집 앞에 한 바구니가 있었다. 그녀는 얼마전부터 보기 시작한 드라마에서 입양아를 그런식으로 발견 하는 것을 떠올렸는데, 그 드라마랑은 달리 바구니에는 어떤 편지도 메시지도 없었다. 단지 한 아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딸아이로 보이는 이 아이의 얼굴에는



"이반 페트로비치가 그려져있었어"



"그 아이를 목으로 졸라 죽였겠구만?"



노파는 킬킬대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젊어서 그녀는 이반 페트로비치를 사랑했으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그를 경멸했고, 김지영을 잃고 나서는 그를 그리워 했다. 노파는 그 모든 감정들에 무덤덤했다. 단지 아이를 소파에 눕히고는, 자기 장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이반 페트로비치를 어르고 달랬을 뿐이었다.



이반 페트로비치의 손녀에게 그녀는 이해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신이 수녀 생활을 시작 했을 무렵 처음 읽은 책의 작가였다. 해인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 아이가 정원을 걸어다니며 이것이 뭐냐고, 저것이 뭐냐고 물어볼 적이었다.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차량이 비탈길을 거쳐 노파의 집 앞에 섰다. 그 안에서 중년 남성과 여성이 나왔다. 바로 노파의 아들딸이었다.



"여긴 뭣하러 왔어?"



노파는 지난 세월동안 키운 정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떠난 두 아들 딸을 원망하는 투가 아니라, 단지 여기 왜왔는지 궁금해 하는 투로 물었다.



"돈이 필요해요"



노파는 기가 막혔다.



"뭐 돈? 내 니 아비 유산은 다 물려줬다! 내 한푼도 안썼고, 주는데 둘이 차별을 둔것도 아이고 공동으로 쓰라고 통장을 줬는디 뭔 또 돈이여!"



"당신 돈, 뱉어내란 말입니다."



노파는 아들의 그 뻔뻔함에 질겁했다. 이번엔 딸이 말을 이었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서 얘기해 엄마."



집으로 들어가자 김지영의 동생들은 어머니를 냅다 서재로 끌고갔다. 집에서 제일 구석진 곳이었다. 아들은 

노인의 두 팔목을 붙잡고 노파를 노려보며 말했다.



"잘 들어요, 돈을 내놔요. 그게 필요하단 말입니다."



노파는 그 20대때의 기력을 마저 짜내어 아들의 손을 뿌리쳤다.



"돈은 뭔 자꾸 돈돈돈! 한평생 이 애미는 찾지도 않고서 무슨 돈타령이고!"



"지영이 죽인 값 내놓으란 말야! 우리 어린시절을 그렇게 망쳐놓고서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막 따지던 노파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진다. 심장을 무언가가 점점 옥죄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노파는 창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반 페트로비치의 손녀가 정원에서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이해인의 눈이 마주친다. 아이는 손을 흔들었고, 노파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 저희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이사람, 투자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잘 안되서 한강까지 갔던 사람이에요. 처도 집을 떠났고 자식도 셋이나 있다고요. 저는 뭐 나은 줄 아세요? 남편이 요즘 얼마나 일에 치어사는지.."



"알지 암. 다 알고 말고."



울그락 불그락 하던 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다. 그는 그 큼지막한 손으로 어께를 움켜지며 다급하게 묻는다.



"알지! 암 엄마는 당연히 알지. 그래서? 돈은? 돈 어딨어?"



노파는 몇발치 뒤로 물러섰다. 서재를 뒤로 한 채였다. 그녀는 자지러질듯 한참을 깔깔 웃어대더니 자신의 아들 딸을 차례로 손가락질 하면서 열변을 토했다. 그녀의 잔뜩 쪼그라든 팔에는 전혀 힘이랄 것이 남아있지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 20대의 활기를 발산했다.



"알지야! 이 잡놈의 씹창노무 새키들아. 현수 느이는 뭐? 투자를해? 웃기고 앉았네. 느이 10년전에 무슨 다단곈지 뭔지하다가 경찰들한테 잡혀 나오는게 티비에 똑똑히 나오더만 뭐 투자?? 아주 지랄이 따로없어이. 거 딸년은 더 미친년이제. 어디 사이비 교주 아랑 결혼해서 야소 그리스도인지 먼지 주구장창 믿더니 사람들 돈 다 떼먹고 급기야는 지가 목사가 되서 사람들 갖다 패는게 신문이고 뉴스고 뭐고 다 나오더라! 근디 뭐?? 힘들어? 니들이 방문판매한답시고 지갑 털어제낀 할머니는 안불쌍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타작 마당이라고 해서 처 맞은 열살배기 아들은 안불쌍하고, 결국 젊은 평생 다 바쳐서 뼈빠지게 일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한 느이 부모들은 !"



그녀는 잠깐의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어디론가로 빨려들어감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때 노파는 자신의 피투성이 몸뚱아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그 권여선의 20대 처녀시절, 정수리를 얻어맞은 남자의 복수를 했다. 서재에 놓인 의자를 들어선 그 노파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친 것이다. 노파는 그것은 지영이의 복수는 못된다며 귀를 틀어막고 부정했으나, 남자는 그 축 늘어진 시체를 계속 의자로 내리쳤다. 어느새 딸도 가세해서 발로 지근지근 밟아댔다. 둘이서 계속 지영이 돌려내라고 외치며 노파를 시뻘건 곤죽으로 만들었다.



"정수리 꼴이 말이 아니구만"



사내는 관짝을 열어보며 시체 꼴을 보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노파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그 형상조차도 사라져있었다. 목소리조차 이젠 멎어든 것이다. 사내는 그 시체를 가슴에 안고선 연기 자국이 있던 자리에 파낸 구멍에 처넣었다. 그리고선 컴컴한 흙덩이를 하나 둘 위에 덮었다. 노파의 육신이 무가 되어 사라져갔다. 곧 그 자리에는 다만 처음 왔던 그대로, 언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총각"



노파의 목소리다.



"난 결혼같은거 관심없어."



"결혼 안하면 다 총각이지 뭐."



사내는 들고온 배낭에서 나무 막대 두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십자로 꼬아서 노파가 있던 자리에 박았다.



"난 불교도인디"



"시끄러"



연기가 또다시 장난을 쳐댄다고 무덤지기는 생각했다. 또다시 그 연기가 노파의 형상을 하고서 나타난것이다. 사내가 짜증낸 체를 하며 아직도 죽은 것이 안믿기냐고 묻자 노파는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총각. 부탁이 있어. 총각이 참 추하고 못난 사람인건 알아. 살아서 만났다면, 말도 안섞었을거야. 하지만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도 뻔뻔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줘. 사내는 그런 쓰레기들의 말을 들어주는거야."



"그걸 들어서 뭣하라고. 그런 감성팔이는 쉼없이 들어왔어. 당신네 딸 아들도 여기 묻힐테고, 비슷한 변명을 하겠지. 나는 하나도 잘못 없다. 전부 빌어먹을 미치광이 엄마 탓이다. 자라서는 교수탓이다 상사탓이다 늙어서는 자식탓이다."



"그걸 적을 수 있지."



사내는 연기가 정말 지독하다고 느꼈다. 어느새 자기 마음까지 읽었단 말인가.



"적어서 뭣해? 그딴 쓰레기들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 것 같나보지? 아무도 안들어. 당신같은 쓰레기들은..."



"당신처럼 글이 추해질까봐 두려운게지."



사내는 그 연기를 향해 삽을 휘두르며 으르렁댔다. 한순간 노파는 사라지더니 다시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알아. 난 추한 여자야. 자식들에게 달처럼 위선적이었고 해처럼 무자비했어. 난 젊어서 책을 많이 읽으면 이런 오만과 편견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어. 좋은 대학교를 나와도, 루스카야에서 국책 사업을 해도, 그곳에서 괜찮은 남편을 만나도,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도 결국 그건 서재 안에서 가만히 책을 읽는 것보다 못한 일이었어. 책을 읽는다는게 사람의 도덕성과 인성을 길러준다는 것은 다 헛소리야. 그건 그 사람이 가만히 서재 밖으로 나가지 않고 책만 읽었을 때만 해당되는 얘기지. 책 밖으로 나가면 그 보잘것 없는 지식이 얼마나 자신을 속박하고 더럽히는지 알게 돼. 결국 내 인생의 의의는 책에서 나온 것이 아냐."



"그래, 시팔 몇천 몇만의 책을 읽고 루스카야까지 다녀와서 80년을 살아놓고서 도대체가 당신은 이룬게 하나도 없어. 당신은 그래서 인간 쓰레기인거야. 모두가 이 쓰레기통에 묻혀야해. 결국 인생은 공허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테니까. 노인이 바다로 나가 청새치를 잡으면 뭐해? 결국 상어뗴한테 다 뜯어 먹힐 그런 쓰레기는 왜 들고 오는지. 당신의 인생도 그 꼴인거야."



"그래 맞아. 내 인생은 쓰레기야.'



사내는 논쟁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도취감에 코를 킁킁댔다. 그러나 이 논쟁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노파는 계속 말을 했다.



"하지만 틀렸어. 나는 그렇게 한순간의 행복을 부정하는 삶을 살았지. 이반 페트로비치는 내 자유분방한 삶의 종지부였어. 남편의 솜씨는 그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지. 물건의 크기는 너무 작았고. 이반 페트로비치는 마음대로 사는 사내였어. 그는 고아였고, 그저 광장에서 그림이나 팔던 사나이었으며, 단지 애인에 대한 열정 하나로 오년이나 쫓아다닌 미친 개새끼지. 그래, 그는 내 사랑이었어. 단순히 술집에서 만난 남자 따위가 아냐. 한떄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가정을 꾸릴 상상을 하던 사내였어. 그러나 나에게는 붓이 있었지만, 그 사내에겐 미래를 그려낼만한 물감이 한방울도 없었어. 그 사내에겐 미래가 없었던 거야. 우린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마스를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지. 한달 뒤 나는 선을 봤고 그 뒤로는 모든게 일사천리였지. 한국으로 잠깐 귀국해 상견례를 보고 다시 루스카야로 왔을때 나는 이반 페트로비치가 자살했다는 것을 들었어. 그가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었지. 품에서 젊은 웨르테르의 슬픔 문고판이 발견됬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 불행한 루스카야인의 죽음 따위는 이슈거리조차 되지 못했을거야.



이반 페트로비치의 망령은 나를 평생 따라다녔지. 난 그 망령을 증오했어. 그래서 이반 페트로비치의 딸을 쫓아냈지. 그러나 남편이 죽고서 나는 그를 다시 봤어. 새벽이었는데, 그이가 달빛으로 속삭이는거야. 자기는 악령이 아니라 나를 축복하는 성령이라고. 정말 위선적이지. 자기가 뭐라고 날 축복해, 달빛처럼 말야. 그러나 그걸 꺠닫고 지영이를 다시 찾았을때, 운명은 나를 절망으로 이끌고 갔어. 나는 과거의 실수에 대해 영영 사죄할 기회를 잃은거야.



그렇다고 생각했지. 나는 이반 페트로비치의 손녀를 만났어. 아무런 편지도 메시지도 없다는 것은 그이가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보냈다는 거야.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 해인이의 기저귀를 갈고, 오줌세례를 얼굴으로 받아내고, 똥을 닦고, 미음을 씹어서 주고, 그런거. 지영이에게 장모님이 해주던 그런거. 그땐 지영이도 참 귀여웠지. 지영이는 어딜가도 이쁠거야. 그 땅딸막한 남편이 아니라 훤칠한 이반 페트로비치를 닮았으니까. 해인이는 무럭무럭 자라났어. 이제 이 꽃이 뭐냐고, 저 나무는 왜이렇게 크냐고 물어봐. 마당의 나무에서 사과를 따다주면, 해인이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해맑게 웃을거야. 나는 그렇게 해인이를 키워냈어. 적어도 해인이를 버리지않고, 때리지도 않고, 사랑으로 키워냈어."



"그 얘는 이제 부모도 없이 클거야."



권여선은 팔짱을 끼고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난 당신같은 무덤지기가 그 아이를 맡아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고, 그러길 원치도 않아.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는데 도대체 뭣때문에 읽었는지 몰라. 난 아직도 당신에 대해서 오만하고, 무덤지기에 대해 편견이 있지. 하지만 난 구원을 얻었어. 이것을 얻기위해 한 평생을 살아온거야. 이반 페트로비치와 함께, 그의 손녀의 남은 앞날을 사랑으로 채워주기 위해서."



사내는 푸후하고 웃었다. 싸구려 기독교도 사상이로군, 그는 생각했다.



"한가지 말해둘 것이 있어. 당신과 노인장이 나를 끌고온 그 강가 한켠에 보면 금은 보화가 가득 든 궤짝이 있을거야. 그건 당신네가 가져. 아들이고 딸년이고 분명 변변찮은 보수만 줬을거야. 지금껏 내 긴 이야기를 들어온 보상이라고 생각해줘.적어도 그 후레자식 년놈들이 가지는 것보단 낫지."



"그건 이미 진즉에 어디 치웠지. 당신같은 저질의 엄마와는 달리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자비로운 어머니가 계시거든"



권여선은 콧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하는 투였다.



"역시 당신들은 하나같이 천하고, 예의없고, 무식해!"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감사를 전하고 있었다.



노파도, 연기의 지독한 장난도 사라졌다. 마음이 글러먹고 생각이 글러먹었고 행동이 글러먹었고 습관이 글러먹은 한 여인의 삶이었다. 이런 한심한 여자도 깨달음을 얻는다는 사실에 사내는 세상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의 목덜미에 걸려 장밋빛 향을 뿜어내는 그 유리병에 코를 대며 사내는, 그것이 참 향기롭다고 생각했다.

해가 서서히 떠왔고, 달은 떠나갔다. 이 망선도에서도 꽃들은 피어났으며, 자기 색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가 구덩이를 판 곳에는 유채색 꽃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그 언덕은 꽃들의 웃음 아래 온통 뒤덮여있던 것이다. 노인네가 멀찍이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유리병에 감도는 장미 향을 풀어주었다. 향기는 그를 어느 한 순간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가 관을 끌고 망선도로 걸어갈 때 한 소녀가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는 그 사내의 빈 손에 장미꽃을 쥐어주는 것이었다. 사내는 이게 뭐냐고 물었다.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소녀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사내는 가만히 웃었다. 그가 망선도에서 처음으로 지어보는 웃음이었다. 그는 자기가 들쳐매고온 관이건 삽이건 망토자락이건 전부다 내던지고 노인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노인을 꽉 껴안았다. 노인은 사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두건이 벗겨진 사내의 입가에 활짝 웃음이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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