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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혀니 Jan 24. 2021

나는 왜 글씨를 잘 쓸까?

나를 만들어준 시간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쓴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학교 친구들은 책상 위에 낙서를 할 때 나의 손을 자주 빌리곤 했고, 칠판에 공지를 적을 땐 선생님께서 찾으셨다. 포스터 같은걸 만들거나 회의록을 작성하면 내 글씨는 한몫을 했다. 필기를 할 때는 뭔가 나한테는 귀찮은 작업이 아니라 검정펜과 빨간펜 파란펜 노란펜 골고루 섞어 예쁜 결과물을 만드는 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필기에 집착하면 공부보다도 필기에 집중해서 문제였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정말 나는 중지에 늘 굳은살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종이에 글씨쓰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과장님께 받은 쪽지


대학교 선배이자 회사 선배인 과장님께 불렛저널 다이어리와 쪽지를 선물 받았다. 과장님께서 작년 크리스마스 때 과장님의 딸들을 위한 산타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나의 글씨체에 대해 매번 칭찬해주신다. 심지어 야호체라는 멋진 이름도 지어주셨는데, 나의 글씨체를 보면 산에서 "야호!"라고 외치고 메아리가 울려퍼지는 느낌이라서라고 하셨다. 정말 과장님의 표현력은 못말린다! 야호체를 직접 그려주시는 과장님과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느날 점심을 먹으며 과장님께서 물으셨다. "송현아 너는 글씨를 어떻게 하다 잘 쓰게 됐어?"







글씨를 언제부터 또박또박 쓰고 싶어졌을까?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맞벌이셨던 부모님은 저녁이 되면 집에 들어오셨고, 저학년이었던 언니와 나, 그리고 유치원생 동생은 부모님을 기다리며 집에서 티비를 보는 일이 많았다. 투니버스 채널에 갇혀서 온갖 애니메이션을 마스터했고, 티비를 보다가 학원에 빠지는 일도 생겼다. 그러니 방학이 되면 일은 더욱 심각해졌다. 티비에 푹 빠져 공부를 놓고 있던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아빠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집에 TV는 없다!"


그렇게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눈물바람으로 티비를 보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얇은 벽걸이식 티비 아니라 뒤통수가 뚱뚱한 옛날 티비였는데, 집 앞 분리수거에 버려진 티비를 안고 엉엉 울며 누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그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부름에 저녁을 급하게 먹어야 했고, 다시 티비를 지키러 나왔을 때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할게 없어진 우리에게 아빠가 숙제를 주셨다. 수학 숙제였는데, 그냥 문제를 푸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었다. 미리 받아놓은 2학년 수학 교과서를 교과서랑 똑같이 노트에 옮기는 거다. 그림도 그리고, 문제도 전부 다 쓰고, 문제를 쓰면 궁금해서 수학 문제도 풀어보고.. 숙제를 안 해놓으면 아빠께 혼이 났기에 언니와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교과서를 똑같이 옮기는 작업을 했다. 크나큰 나의 글씨에 비해 교과서의 글씨들은 작아서 따라 쓰는데 애를 먹었고, 교과서 글씨랑 비교하면 삐뚤빼뚤한 나의 글씨가 점점 맘에 안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글씨의 모음들은 교과서의 글씨체처럼 한껏 멋들어지게 꺾여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담배를 싫어했던 모양이다. 모음이 멋지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맞이하기 전의 일들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내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순간이어서일까? 아빠의 최후통첩이 아니었다면 나의 글씨는 개발새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까마득하게 지나왔던 순간들이 나의 한 부분이 되어 빛을 내고 있다는게 새삼스럽게 크게 다가오고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순간들이 모이고 하루하루가 하나씩 모이면 또 다른 나의 매력 포인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미뤘던 브런치 글을 다시 썼으니 작은 순간 하나 적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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