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중 ‘샤우팅 사건’ 돌아보기
살다 보면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고 갈등과 긴장국면에 맞닥뜨리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럴때면 싫은 소리를 똑 부러지게 하는 대신 어버버하는 타입이라 평소 웬만한 건 참고 넘어간다. 다행히 둔감한 성향을 지녀 크게 화 나는 일도 많지 않다. 까칠하기보다는 성격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 그런 내가 유독 못 참는 사람이 바로 엄마다. 엄마는 수시로 나의 분노 게이지를 올려서 시험에 들게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얼마 전 운전하던 차 안에서 엄마한테 큰 소리를 지른 일은 내 자신에게도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큰 소리를 낸 기억이 거의 없는데 구십 나이의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패륜이 따로 없다. 그날은 큰 동생이 이사한 집으로 엄마를 모시고 가는 길이었다. 동생의 이사가 못마땅했던 엄마는 끊임없이 불만과 불평을 이어가셨다. 길이 왜 이렇게 밀리냐, 이 길이 맞냐, 00네는 왜 점점 서울과 먼 곳으로 이사를 가냐, 이래서 내가 걔네 집을 어떻게 가냐, 장사를 하더니 돈을 밝히는 것 같다 등등.
내비에 의존해서 낯선 길을 운전하느라 예민해진 나는 엄마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했고, 엄마는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는 말도 못하냐고 응수하셨다. 엄마의 블라블라가 듣기 싫어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자존심이었을까? 엄마는 라디오를 끄라는 말은 안 하시고 아무 거나 만지고 누르면서 라디오를 직접 끄려고 시도하셨다.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왜 우리 엄마 사전에는 “그래 알았다”라는 멘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걸까? 왜 우리 엄마는 아들네가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더 먼 곳으로 이사하는 게 기특하거나 안쓰러운 대신 당신의 방문이 힘들어진다고 뭐라 하실까?
“엄마는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거야? 내가 길을 몰라서 그러니 좀 조용히 해달라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그리고 엄마가 언제 걔네 집에 혼자 가셨어? 어차피 우리가 모시고 다니는데 뭐가 그렇게 불편해졌다는 거야?”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없는 말을 지어냈니? 그리고 전에 살던 집은 내가 지하철 타고 혼자 다닐 수 있었다고.(물론 사실 아님!)” 그렇게 격앙된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결국 “그만 좀 해! 제발 차에서 내릴 때까지 조용히 가자고!!” 소리를 치고 말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도로 한 켠에 차를 세우고 혼자 내리고 싶었다. 다행인가? 소리 지른 나도 움찔했는데, 엄마는 굴하지 않고 큰소리로 계속 같은 말을 하셨다. 참자, 도착하는 즉시 엄마만 내려드리고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가리라! 조금만 참자.
그 사건이 아니라도 나는 평소 유독 엄마에게 짜증이나 화를 많이 내는 편이다. 엄마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자주 잔소리를 하곤 한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은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 태도가 잘못된 건 아닐까? 엄마의 인지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수시로 지적질을 하는 걸까?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가 SBS 예능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던 영상을 발견했다. ‘우리가 엄마에게 화를 많이 내는 이유’라는 자막에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즉 내 의도대로 되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래서 상황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나 동물의 왕인 사자나 호랑이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에게 화를 많이 내는데, 이는 우리 뇌에서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내측 전전두피질 영역과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인지하는 영역이 실제로도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람은 나를 인지하는 영역과 엄마를 인지하는 영역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엄마와 나를 분리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며, 나를 통제하듯 엄마도 마음대로 통제하려 든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자주 화를 내는 건 뇌 기능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면 엄마와 나를 분리하고 ‘적절한 거리 두기’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인 엄마가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요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엄마와 내가 일부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다른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가. 그래, 이해를 못하면 외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이해가 되는 날도 오겠지... 근데, 이건 뭐 엄마 자리에 자식을 넣어도 100% 성립하는 문장이 되고만다. 왠지 서글프다.
엄마가 내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건 나 역시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일 터이다. 그동안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엄마와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 건 쉽지 않은 루틴이었다. 대통령 인물 훤하다는 이야기와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다고 자신을 비하하는 발언은 어느 게 더 듣기 싫은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며느리자〮식에 대한 서운함 토로와 텔레비전 화면 속 등장인물을 디스하는 멘트는 자주 나의 지적질 욕구를 부추긴다.
요즘은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일단 엄마의 주 서식지인 거실 소파와 거리를 두고 주방 식탁의자에 앉는다. 예전에는 질문에 대답하려 애쓰고 틀린 이야기는 정정해주느라 기운이 빠졌는데 요즘은 가끔 ‘어, 맞아요’를 대충 던지고는 유튜브를 보거나 핸드폰질을 한다. 엄마는 혼자서도 이야기를 잘 하시는데 대화가 아니라 옆에서 들어주는 사람으로 족한 것 같다. 그렇게 KBS 일일드라마 <우당탕탕 패밀리> 시청까지 동참한 뒤 피곤하다며 슬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통의 순서다. 평상심으로 엄마와 9시 뉴스를 함께 보는 건 아직까지 미션 임파서블.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장가도 안 가는 외손자 비난이 길어질 것 같으면 일단 패딩을 걸친다. 아파트 산책이 주 탈출로이고, 가끔은 밤 10시까지 문을 여는 마포중앙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한다. 엄마의 지적질을 무시하기 힘들 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침에 같이 식사를 하려고 늦잠 주무시는 엄마를 채근했지만 요즘은 나 혼자 챙겨서 먹고 집을 나선다. 저녁식사는 같이 하는 편이니, 아침은 각자 편한대로 하는 거지 뭐.
엄마에 대한 내 태도의 지향점은 이웃 할머니를 대하는 친절과 ‘영혼 없는 리액션’이다. 마음과 에너지를 담으면 기대하고 요구하고 실망하기 십상이다. 내 의지로 뇌의 내측 전전두피질을 엄마와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연습과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아, 운전 중 샤우팅 사건은 어떻게 되었냐고? 차에서 씩씩거리며 내렸던 나는 동생 부부의 급한 심부름을 돕다가 엄마와 충돌했던 감정이 누그러졌고, 아무일 없다는 듯 모시고 돌아왔다. 가족이란 이런 관계인 모양이다. 그래서 발전이 어려운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