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헷갈리게 하는 두 딸 '분홍'과 '옥희'
올해의 드라마 중 tvN <미지의 서울>을 가장 재미있게 봤다. 단조로운 내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을 준 고마운 드라마다. 작품에 대한 분석과 상찬이야 다른 잘 하는 분들이 많으실 테니 생략.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드라마10화 중간쯤 등장하는, 찐친 염분홍(김선영 분)과 김옥희(장영란 분)가 나눈 대화였다.
옥희 엄마의 상태가 나빠진 상황에서 요양병원에서 두 사람은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혹은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랐던 옥희는 약해진 엄마의 모습에 혼란을 느낀다.
“저런 양반 아니었단 말야.”
“늙으면 다 애 된다는 말 못 들어봤어? 다 똑같지 뭐.”
“우리 엄만 아니야. 소박 맞아 쫓겨날 때도 빨리 안 걷는다고 나 혼내던 양반이란 말이야. 내가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속에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뭘 미워했는지를 모르겠잖아. 평생을...”
“안 늦었으니까 얼마나 다행이니. 나도 우리 엄마 사랑 못 받아봤어 ....... 평생을 찬밥 신세로 살았어. 그러다 호수아빠 만나고 사랑이라는 거 처음 받아봤다. 그거 받아보니까 알겠더라. 이게, 사랑이라는 게 받아봐야 줄 수도 있는 거구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만약에 내가 우리 엄마 먼저 사랑해줬으면 우리 엄마도 나를 사랑해줬을까? 나는 이미 늦었지만 옥희 너는 아니잖아. 야, 더 늦기 전에 니가 먼저 드려. 응?”
이거 뭐지? 딱 나와 엄마 관계잖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원래 자존심 강하고 성취욕 높은 엄마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더욱 자기주장 세고 독립적인 양반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충분한 애도와 슬픔의 시간 대신 너무 빨리 자식들과 살아낼 궁리에 빠진 엄마를 보며 뭔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1녀3남인 우리 남매는 누구 하나 엄마의 칭찬이나 응원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자랄 때는 늘 부족함을 지적당하고 더 잘하라고 채근 당했다. 각자 성인이 되어 독립한 이후에는 부족한 효심을 질타 당해야 했다. 그러면서 타인들에게는 과도한 자식 자랑과 과장된 칭찬을 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셨다.
때로는 짜증이 나서, 가끔은 비아냥으로, 드물게는 진심으로 “엄마, 엄마는 자식들이 고맙거나 대견한 적 없어? 가끔은 자식과 손주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면 안 돼? 사랑하기는 하는 거지?”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사랑을 줄 줄 모른다. 딸 많은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서 사랑을 못 받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분홍은 뒤늦게 남편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통해 갈급증을 채우고 사랑에 넉넉한 사람이 되었지만,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를 맞은 우리 엄마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듯하다. 사랑이라는 게 받아봐야 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녀의 대사는 우리 엄마의 주장을 증명하는 증거인 셈인가. 그러면서 그녀는 친구 옥희에게 네가 먼저 주라고 네가 먼저 엄마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아흔이 넘은 우리 엄마도 평생 사랑 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던 걸까? 내가 먼저 사랑을 주면 엄마도 나를 사랑해줄까?
사실 내가 그 장면에서 흠칫했던 건 다른 데 있다. 드라마를 보기 직전 엄마의 학습지(엄마는 노인용 학습지를 하고 계신다) 강사와 통화를 했는데, 평소 내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엄마의 발언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나를 만나면 암 환자인 딸을 걱정하고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는 대신 “길 지나가다 만나면 못 알아보겠다.” “쯧쯧, 살은 빠져가지고...” “임 보살(엄마 친구분)도 암이었는데 멀쩡하게 절에도 다니고 잘만 살더라.”와 같은 말씀을 하시곤 한다. 속마음은 걱정이 없을 수 없겠지만 늘 아픈 나를 타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랬던 엄마가 그 학습지 강사에게는 내 걱정을 엄청하신다는 것이다. 장녀라 아버지없이 남동생들 건사하고 챙기느라 애를 많이 썼다, 남자를 잘못 만나 고생했다,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특차로 갔다, 고생만 했는데 나쁜 병까지 걸려서 속상하다 등등 대체로 자랑과 걱정의 멘트들이다. 우리 엄만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는 옥희의 대사가 나의 대사가 되고만 것이다.
엄마가 타인에게일지언정 나에 대한 걱정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어색했다. 아무리 친부모라한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랑을 셀프 감지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혹은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엄마를 뒤에서 디스하거나 힐난하면서 살아 왔는데, 드라마 속 분홍은 내가 먼저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준다. 내가 먼저 엄마를 사랑하면 엄마도 나를 사랑할까? 그런데 엄마를 먼저 사랑하는 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사랑을 안 받아봐서 줄 줄 모르는 건가. 낭패다.
*드라마 최종회를 보면 옥희 엄마가 딸인 옥희를 심하게 대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었고(물론 그렇다한들, 그럼 안 되는 거였다. 어린 딸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관계는 해피엔딩을 맺는다. 나와 엄마는 어떻게 될까? 우리도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다정한 모녀지간이라니, 상상이 잘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