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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절연가족 04화

극성엄마

지금 생각하면 학대

by 퍼플슈룹

평범한 집안 3남매 맏이로 태어나 난, 극성엄마 밑에서 요란스럽게 자랐다.


엄마는 뭐든 알아서 해줬다. 초등학교 때 엄마는 점심시간에 맞춰 뜨끈뜨끈한 밥과 새로 만든 반찬을 도시락에 정성스럽게 담아 교문에서 건네주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던 엄마가 생각난다. 우산을 주러 왔다기보다 비에 옷이 젖는 게 싫어서 덜 젖게 하려고 엎으러 온 것이었다.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남동생을 데리러 다시 학교에 가셨다. 남동생까지 하교를 시켜야 안심했던 엄마. 무려 내가 6학년 때까지 이렇게 하셨다. 나를 업고 집에 가는 엄마가 싫었다. 창피했다. 그런데 집에 가서 옷 젖었다고 혼나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견딜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려면 양말 검사를 반드시 받아야 했다. 양말이 지저분하면 절대 우리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친구들이 놀러 와주었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극성이면서 두 얼굴의 엄마기도 했다. 중학생 때 일이다. 분명 거실에서 기분 좋게 얘기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불과 5분도 안 돼서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엄마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린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변덕스러운 상황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았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청소년기 내내 아니, 내가 성인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자주 들은 말은 "야! 저리 가. 네 까짓게 뭘 할 줄 안다고"였다. 식사 중에 반찬을 흘려도 혼났고, 엄마가 시킨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제대로 못 한다고 비난받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한 여름, 파리채로 파리를 죽이고 바닥에 떨어진 파리를 날 보고 버리라고 말하는 엄마에게 절대 할 수 없다고 버티다 파리채로 맞은 기억이 생생하다.


20살, 첫 아르바이트를 커피숍에서 하게 됐다. 지금은 커피숍이 금연이지만, 90년 대 초반에는 테이블마다 재떨이가 있을 정도로 흡연이 자유로웠다. 4시간 밖에 근무를 안 했지만, 담배 냄새가 온몸에 가득했다. 집에 가면 어김없이 욕을 먹고, 내 옷은 베란다로 던져졌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내 숨구멍이었던 아르바이트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도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현대 관점에서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정서학대를 당한 게 분명하다. 원망 속에 살아온 날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건 내가 독립한 이후부터다. 매일 붙어있다가 한 발짝 떨어져서 엄마를 바라보니 '그래, 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분노가 가득했던 마음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물론 공부하면서 내 마음을 수련하는 것도 병행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내 안의 뾰족함이 뭉툭해진 건 아니다.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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