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는 공공의 적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스스로가 공공의 적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더 화났던 일을 풀어보려 한다. 그날은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고 다녀야 했던 날로 기억한다. 그날도 여전하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어이, 미쓰리 커피 한 잔 부탁해!
'아.. 오늘도 시작이네'
멋쩍어하는 목소리였지만, 출근부터 퇴근까지 자리를 지키며 하는 일 대부분이 커피, 녹차를 얼마나 마시던지. 직장을 왜 다니는지 의문이 가득 들게 했다. 더군다나 허세가 심했고, 사람들을 많이 무시했다. 100여 명이 다니는 직장에서 따르는 이 하나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분의 입지가 설명됐다.
어쨌든 우리는 탕비실로 이동했는데, 그날따라 같이 근무하는 언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언니! 괜찮아요?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오늘은 진짜 가만 못 있겠어. 너무 얄미워!"
그리고 탕비실로 씩씩대며 걸어갔다. 뒤따라 들어갔는데, 언니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커피에 약을 타고 있었다.
"언니! 미쳤어? 뭐 하는 거야?"
"설사약이야. 화장실 좀 들락거리라고 해"
무서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난 고개도 못 들고 있었지만, 언니는 태연하게 그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언니가 갑자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2년을 함께 지내면서 본 적 없던 낯선 모습이었다. 착하고, 남들한테 싫은 소리도 못 하는 순둥이었는데.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그분이 화장실을 갔다. 그런데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설사 증상으로 화장실을 가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실패한 듯 했다.
"설사약도 이기다니, 약이 모자랐나 봐. 다음에는 더 넣어야겠어"
"제발, 언니! 그만하자. 저 인간 미운 건 맞지만, 그런 행동은 하지 말자! 응?"
"알겠어. 그런데 진짜 꼴 보기 싫어"
맞다! 나도 그분이 죽도록 미웠다. 얄미운 사람 맞다.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수다 떨고, 커피나 마시고, 낮잠 자고, 술 약속이나 잡는 일뿐. 그리고 사장님한테 자주 혼나면서 사장님만 없으면 회사 주인인 양 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외로운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설사약 에피소드(?)는 그렇게 끝났고, 이후 특별한 일 없이 재미있게 직장 생활하다 난 대학을 가기 위해 퇴사했고, 언니는 계속 근무했다. 그리고 인연이 끊겼는데, 5년쯤 후에 일본에서 가이드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 언니와 만난 것이다. 그것도 음악을 하기 위해 한국생활을 완전 접고 일본에 들어왔다는 말에 더 깜짝 놀랐다. 긴 대화를 못 하고 연락처만 주고받았지만, 연락이 다시 끊겼다.
함께 일할 때도 의문투성이였던 언니였지만, 음악이라니... 그때 당시 고위공무원 딸이었던 언니는 사장님도 못 건들정도로 직장내 넘사벽이었다. 살면서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었다'라고 했는데... 26년이 지난 지금 뭐하고 사는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