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례자 현황 Sep 26. 2021

#21. 더 지치기 전에 순례길에 온 이유

당신은 어떤 이유로 이곳에 향하고자 하나요



오늘은 조금 무거운 글이다.

무겁고 조금 어두울 수 있다. 혹시나 불편하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가끔은 어두운 것을 조금 멀리 하고 싶은 날이 있으니


레온 연박, 하루 더 머무르는 날


늦잠 자고 여유로운 한 때, 오후에 레온 도시 산책을 했다. 저녁엔 도시 야경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 길을 걸으며 행복한 시간 또 근심 걱정 없는 마음 편한 시간들에 젖어들었다. 단 십여 일의 시간이었지만 내 마음은 너무나도 편안해져 있었다. 


짙어진 편안함에 찾아온 여유는 한편으론 이 마음의 평온의 끝을 생각하게 했다. 내가 속해있던 시간들 중 이번만큼 마음 편안한 시간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현듯 찾아온 이 "끝"에 대해 갑자기 민감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끝"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이 걸음이 마치는 날, 다시 내가 속해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순간 어딘가에 맡겨두었던 불안감이 다시 꼬리를 살랑 흔들며 "형 왔어?"하고 나에게 돌아올 것 같았다. 


레온 대성당 광장 앞 어느 레스토랑의 패티오에 자리 잡았다. 

 햇살은 내 얼굴에 따뜻하게 내려앉았고, 주변은 평화로 무장하고 분위기를 감싸고 있다. 충동적으로 떠나온 산티아고 순례길, 예능프로 "스페인 하숙" 하나 보고 출발 일주일 전 즈음 항공권 티켓팅을 했던 날이 생각난다. 


스페인 하숙에 나오던 순례자들은 떠나온 이유를 각자의 이유로 대답했다. 무언가 답을 찾고자, 혹은 새로운 앞길을 준비하는 데 있어 다시 무장하기 위해서 혹은 종교적으로.


내가 떠나온 이유?

나는 쉬고 싶었다.
더 지치기 전에....

 더 지치기 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왔다. 도망이었을까? 하루하루의 압박감에서 인생 처음으로 도망을 택했다. 도망치게 된 내 이야기를 적어볼까


1. 스무 살 이전부터 경제적 독립을 시작해야 했다. 여유롭지 못했던 상황에 고등학생 때는 학교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급식을 신청할 수 없었다. 수업 후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20살이 되어선 대학에 잠시 머물렀을 뿐 금세 내가 갈 곳은 편의점과 공장이었다. 그렇게 준비하여 다음 해에 대학에 다시 들어갔지만 2학년 1학기 수업 4일째 되는 날, 동기들과 점심을 먹고 내 발걸음은 강의실이 아닌 학사처에 휴학계를 접수하러 향했다. 

이렇게 꾸역꾸역 붙잡고 간다고 바뀌지 않을 거다.



 1년을 마치고 나니 그런 깨달음을 받았다. 

마음속으론 알면서 부정했고, 나는 또래들처럼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내 욕심이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당시 아버지의 건강은 차츰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성적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알바로 생활비를 채운다 하더라도 우리 세 식구 살림을 유지하기엔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렇게 대학생 1년의 삶을 누린 것이 또래 친구들을 따라가고자 하는 욕심이란 걸 2학년 1학기 4일째 되는 날, 나는 인정하게 되었다. 




2. 군대도 미루고 쉬지 않고 일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더 열심히 일하면 인생이 바뀔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20대 초반에 시간의 가치를 돈으로 교환했다. 만일 이때 내가 금융지식에 대해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때 동대문에서 일하며 대학 나오지 않아도 이렇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도 했다. 엑스트라 배우를 하며 어쩌면 이곳으로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그렇게 20대 중반에 군입대를 했다. 제대할 때 즈음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더 이상 휴학할 수 없으니 복학하지 않으면 제적된다고.  제대하고 3일 뒤 복학이었다. 답답함이 다시 찾아왔다.


말년 휴가 2주 나와 10일간 막노동을 했다. 적어도 복학하고 처음 한 두 달은 버티기 위해서였다. 부대 복귀하여 말년휴가와 앞으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속에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나만 홀로 외딴곳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난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해 하고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싶지 않았다.

3. 제대 후 

아직까진 내가 노력하면 인생은 바뀔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살았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에 복학하고, 학생이지만 동시에 직장인이 되었다. 복학 후 3년간 아침 7,8시에 나와 밤 12시가 넘어 들어가는 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도 대외활동, 봉사활동을 틈틈이 했고,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배우며 보조 일을 했다. 또 때로는 유흥가에서 일하며 다른 것보다 쉽게 돈 버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었다. 주말에 시간이 될 때는 허삼관이 되어 생동성시험에도 참가하곤 했다. 나에게 대학 생활은 무엇일까? 이렇게 바쁘게 사는 중에도 무언가를 성취하는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대견함은 어떤 공백에 대해 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었다. 대학 4년 다니는 동안 OT, MT 한번 가지 못했었다. 폭넓은 대학 생활은 애당초 무리였고 당시 나는 Make money가 최우선 순위였다. 


4.  다행히 졸업 후 기업에 취업했다. 

 이전보다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작아지긴 했지만 가지고 있었다. 

일단 취업하면 가장 큰 관문을 넘었으니 시간이 흐르며 해결될 거라는 마지막 믿음이었다. 수십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쉽게 돈 버는 길에 유혹도 있었지만 결국은 이름을 말하면 아-거기? 할 수 있는 정도의 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이제 정말 제대로 된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안도했다. 

 그래 결국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노력이 보답해주었구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이 결승선에 다다른 마라토너처럼 기뻐했다.

 회사 생활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치열한 경쟁 속에 있었지만 경쟁을 즐기며 때로는 동료들과 합심하였다. 직장 생활이 1년이 지났다. 회사 생활도 했지만 작은 온라인 비즈니스를 했다. 대학생 때 아버지가 내 앞으로 받은 대출이 있었는데, 졸업하자 귀신같이 알고 상환 독촉이 왔다. 취업했으니 차츰 안정적으로 변해가리라, 또 삶의 여유가 생기리라 생각했는데 그 믿음은 이 대출금 앞에 힘 없이 모습을 숨기기 바빴다. 이게 "진짜" 현실이었다. 학생이란 신분의 방패막은 생각보다 강력했었다.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지만. 또 취업 후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이전에 정부로부터 받던 각종 지원은 모두 끊기기 시작했다. 아 이게 현실이구나... 냉정하게도 세상은 기뻐하고 자리 잡아갈 시간을 주지 않았다. 회사 월급만으론 부족하다. 그렇게 해서 온라인 쇼핑몰을 시작했다. 


5. 인생의 피로감이 절정에 달하였다. 약 2년여 될 때, 퇴사를 결심했다. 


대학 생활? 캠퍼스 낭만 따위 모두 포기했었다. 대학 수업에 충실했고, 쉬지 않고 일했으며 취업한 뒤에도 개인 비즈니스까지 운영해도 모든 게 충당되지 못했다. 여전히 여유가 없었고 쪼들려야만 했다. 사실 이전부터 억울함과 분한 마음은 가득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단지 가족이란 사슬로 포기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기 시작한 이 시기 즈음, 나는 분노했다. 내 20대를 포기하고 바쳐온 모든 것들이... 내가 쓰지도 않았던 돈들로 메꿔지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여전히 그것들을 메꾸기엔 부족하다는 사실이.


 회사 생활을 지속한다 하여도 내가 처한 상황에 돌파구가 될 수 없겠다는 걸 계산했다. 이미 내 신용도엔 크게 문제가 생겼고 월급으로 빚을 메꿔나갈 순 있었지만 내 30대를 위해 모아갈 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캐나다행을 택하였다.


이들과 멀어지기 위하여

또 조금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하여

해외여행에 흥미 없던 나에게, 뜻하지 않게 찾아온 해외 생활. 

 해외에 나와서도 역시 쉽지 않았다. 이곳에 온 지 한 달 만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가까이 누워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엔 못된 집주인을 만나 보증금(디파짓)을 돌려주지 않아 법원에 소송을 걸어 중재 요청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백신 부작용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2주 가까이 입원해있기 까지.. 정말 사나운 삼제를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대출금 모두 상환하였다. 조금이나마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미뤄두었던 금융공부로 적게나마 용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30대가 되었다. 20대라는 방어막 한 커플 벗겨졌다.


그 해 2월, 수 천만 원의 대출금 상환을 마쳤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피식 웃었다. 그동안의 내 시간과 노력들 그리고 마음고생들이 이 문자 메시지 하나로 끝이구나?

서글펐다. 너무 서글픈 밤이었다. 분명 기뻐야 했지만 기쁜 마음은 눈곱만큼 없이 마음속에 서러움이 가득 찼다. 새벽에 집 앞에 나와 달을 보며 아무 생각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나는 지금 뭐 하는 걸까...  내가 지금 맞게 사는 걸까? 하는 물음은 진즉에 집어치웠다. 그저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오직 이 생각만이 가득했다.


6. 이젠 너무 지쳐버렸다. 

 

쉬지 않고  20대를 보냈고, 대학 생활 내내 악착같이 성적장학금을 받으려 애썼다. 힘들다는 취업까지 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사업까지 욕심냈다. 그럴수록 마음에 병이 들었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하며 무시하고  해외로 나왔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삶을 바꾸기 위하여 10년 조금 넘게, 나는 달려왔다. 물론 다른 이들의 험난한 여정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에겐 내 인생만이 보였고 이 자체로 너무 지쳤다. 누구든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길 바랬지만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인생들에 대해서. 연애를 할 때도 내 삶을 보여주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병들어가고 있었고 대출 상환 완료 문자를 받은 그 해에 


나도 이제 제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쉴만한 자격이 있어 이젠


단지 그뿐이었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그렇게 나는 갑작스럽게 산티아고 스페인 순례길로 향했다.

이 길을 마친 지금, 삶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나는 그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마음 편히 그리고 아주 행복하게 쉬고 왔다. 초등학교 시절 우린 50분 수업을 하고 10분씩 쉬는 시간을 갖었다. 이 짧은 10분 동안 우린 수많은 친구를 사귀고, 장난도 치며 매점에 가서 빵도 사 먹는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쉬는 시간이었다. 마치 그 시절의 쉬는 시간 같았다. 아주 짧지만 굵게 에너지를 채우고 돌아왔다.


달라진 점은 오직 그뿐이다.

내가 지쳐가는 시기를 , 더 지치기 전에 뒤로 늦출 수 있었다. 


더 지치기 전에 산티아고 스페인 순례길. 

그 덕분에 나는 더 지치지 않았고 잠시 일시정지 상태로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다시 지쳐가는 중이고 해피엔딩은 언젠가 숨을 멈출 때 피날레를 장식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또다시 지칠 시기가 온다면 나는 부담 없이 떠날 것이다.

El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한 그곳으로.


Buen Camino.



이전 09화 더 지치기 전에 순례길#20. 마차에 이어 기차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