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5일은
음력 9월 9일 중양절
어제 홍콩은 쉬는 날이었다. 매해 별 의미 없이 보내다 올해는 마음먹고 찾아보았다. 쉬더라도 이유는 알고 쉬어야지.
날짜와 월의 숫자가 겹쳐서 “중”
그 숫자가 홀수 즉 양수여서 “양”
그래서 중양절!
3월 3일 삼짇날, 7월 7일 칠월 칠석 그리고 9월 9일처럼 홀수가 겹치는 날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래된 명절이며 당송시대 혹은 춘추 전국시대부터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때는 추석보다 더 큰 명절이었다고 한다.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동한) 앞날을 보는 도인이 한 학생에게 중양절에 필시 큰 난리가 날 것이니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면 재난을 면한다고. 이후 국화주를 마시며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게 중양절의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 유죄
이런 전설과 풍습은 1도 모른 채 그저 지나가는 가을 날씨가 아까워 그냥 무작정 나가보았다.
나와 달리 늘 새로운 길에 목말라 있는 남편 덕에 나서는 레이유문(Lei Yue Mun) 윌슨 트레일(Wilson Trail). 사이완호(SaiWanHo)까지 이동해 배 타고 물 건너 보기로.
바다 한가운데서 맞는 시원한 가을바람.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며 헝클어져도 떡이 져도
그저 좋았다.
Lei Yue Mun Wilson Trail
드디어 도착한 레이유문.
레이유문은 사실 해산물 먹으로 많이들 놀러 오는 곳이다. 바다에서 막 잡은 회를 자릿세 내고 먹는 해산물 식당들이 많다.
그러나 먹은 것 없이 먹어도 몇십만 원은 훌쩍 넘게 나오는 바가지 시가로도 유명하다. 그다지 깨끗하지도 맛있지도 않았던 그 한 번의 기억 때문에 이후 발걸음을 끊었다.
사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은 Devil's Peak Battery였지만 너무 늦어져 중간 출구로 빠져나왔다.
전체 윌슨 트레일 코스는 약 9km로 4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3시간이면 넉넉잡을 듯. 구릉지를 잇는 트레일이라 가볍게 동네 뒷산 정도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듯 모든 등산이 처음 몇십 분이 제일 힘든 것 같다. 올라가지 않으면 내려올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아찔한 비탈길 계단에 계단이 이어지고 또 계단이 이어진다. 끝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르막길에 누군가 이 계단만 오르면 이제 평지라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면 조금은 수월했을까.
인생도 마찬가지.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 누군가 터널 끝 빛을 보고 와 말해준다면 이제 곧 이 힘든 여정은 끝이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다독여준다면 마지막 10m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어갈 수도 있을 텐데.
아이에게 터널 끝 빛을 보고 격려해 주는 부모가 되길 소망한다. 이제 다 왔다고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다음번에는 정말 할 수 있을 거라고 너이기에 엄마는 믿는다고.
순간 약수터인가 했지만 모두가 손만 씻고 가는 물 졸졸 수도꼭지를 지나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바다 건너 저 멀리 센트럴까지 보이고 오를 때 맺혔던 땀이 식자 처음의 힘듦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남쪽 바다로 탁 트인 전망대에 서서 양옆을 바라보자니 홍콩의 공원 묘원이 쫙 펼쳐져 있다. 언뜻 봤을 때는 계단식 농법인가 했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비석.
도무지 옆 비석과 간격이 없다.
생전에도 좁은 길 많은 사람에 치이며 살아갔을 홍콩 사람들. 죽어서도 넓은 부지에 혼자 묻히지 못하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에 괜히 씁쓸해졌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풍수와 맥을 같이 해서 일까. 해 잘 드는 양지바른 언덕에 뻥 뚫린 바다를 바라보는 묘원은 풍수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후손 대대 복이 한 아름 내려질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혼자 앉아 골똘히 사색에 잠기신 아저씨.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고독해 보이는 쓸쓸한 등 뒤로 따스한 햇볕이 어루만져 주는 손길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다.
다시 레이유문 페리 타는 곳으로 돌아와
배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
매번 가던 트레일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전한 윌슨 트레일. 트레일 입구를 찾느라 트레킹 한 거리보다 더 많은 거리를 걷고 모기를 무려 8방이나 물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난.
계획 주의자였다. 미리 말하지 않고 어디 가는 게 왜 그리 싫었는지. 일상을 벗어나는 게 귀찮고 성가셨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번 레이유문의 느낌은 오늘과 사뭇 달랐다.
바라만 봐도 현기증 나던 뱃멀미, 선착장 바다 짠 내에 내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눈조차 뜰 수 없는 강한 햇빛에 그늘 없는 곳은 어디도 가기 싫었고 사진 포즈 취하란 말에도 아 그냥 대충 찍으라고.
그러던 내 마음이 변했나 보다. 바다 바람맞으며 사진 찍느라 뱃멀미는 느끼지도 못했고 해 질 무렵 선착장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입구를 헤매며 돌고 돌아도 덕분에 여기까지 와봤다며 웃을 수 있었다. 가려던 Devil's Peak을 못 갔다는 말에 다음을 기약하기까지 했다.
왜 변했을까 내 마음. 언제 변했을까.
세상은 그대로인데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더니 내가 딱 그랬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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