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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Oct 29. 2020

미니버스 타고  산 넘고 바다 건너는 초행길

홍콩의 미니버스 도전기


우리 모두 인생의 오늘은 처음이라


늘 맞이하는 하루는 누구나 처음이다.

처음은 설레지만 서툴다.

처음 떠나는 길, 초행길도 그렇다.


어릴 적 처음 가는 길은

수학여행 전날처럼 두근두근 한없이 설레었다.


어른이 된 지금,

초행길은 피할 수면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

귀찮고 쓸데없는 걱정만 더해주는 "일"이 되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초행길에 대한 걱정.

MTR(홍콩 지하철)도 이어지지 않은 곳, 2층 버스도 닿지 않는 곳이라 미리부터 검색에 들어갔다.


바다 건너 산 넘는 1시간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홍콩에서 한 시간은 꽤 먼 거리이다. 우버나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미니버스를 타 보리라 마음먹었다.


혼자서 미니버스를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친구들 따라서 타본 적은 있지만

꼬불꼬불 초행길에 광둥어도 못하는 나에게

미니버스는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요금도 제멋대로, 정류장도 기사에게 말해야 세워주는

미니버스는 안전한 우버와 택시를 두고

쓸데없이 사서 하는 그야말로 모험의 여정이었다.


Photo by @chromatograph/unsplash.com



홍콩의 산과 바닷길을 이어주는 미니버스


미니버스의 정식 명칭은 Public Light Bus(PLB)이다.

MTR(홍콩 지하철)과 2층 버스가 다니지 않는

산길이나 해변길 같은 구석구석 좁은 도로를 달리는

홍콩 서민의 발과 같은 존재이다.


녹색(GMB)빨간색(RMB), 두 종류이며

16개 혹은 19개의 좌석으로 운영되고 있다.


‘저 버스만큼은 탈 일 없었으면.’


미니버스를 처음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그만큼 언뜻 보면 허름하고 낡은 시골버스 같았다.


녹색 버스(GMB)는 일반 버스와 거의 같은 시스템이다. 탈 때 옥토퍼스로 요금을 내고 정해진 운행 스케줄로 움직인다. 반면 빨간 버스(RMB)의 운행 스케줄은 가변적이다. 요금 내는 방법도 다르다. 탄 거리만큼 요금을 내기에 내릴 때 요금을 낸다. 현금을 내도 되지만 홍콩 버스는 미니버스뿐만 아니라 2층 버스도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어디든 세워주는 미니버스


초창기 미니버스는 버스보다는 '공유 택시'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니버스를 탄다면 언제든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다. 산 길을 오르다 가도 공사 중인 곳에서도 내려준다. 단, 버스 탈 때 미리 기사에게 말해 놓아야 한다.


"OOO 음꺼이~"


뿐만 아니다. 기사에게 직접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거라 '말해야'한다. 그럼 기사는 왼손을 살짝 들어 알았다는 사인을 보낸다.


아니! 분명히 하차 버튼이 떡 하고 있는데 왜 굳이 말로 할까? 홍콩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예전부터 습관이 되어 그냥 그렇게 한다고. 버튼이 없는 버스도 아직 많다고 한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이었다.

광둥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 나 제대로 내릴 수나 있을까? 목소리는 어느 정도 크게 내야 하지? 기사가 못 듣는다면? 초행길에 한 정거장 전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그렇게 초행길은 여행길이 되고


드디어 당일,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적어도 몇 시엔 집에서 나가야 하는지 따져보다 다시 한번 구글맵으로 미니버스 정류장이 어디에 있는지 몇 번을 타야 하는지 배차 간격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다. 괜히 옷도 편한 걸로 입고 운동화 끈 꽉 조이며 집을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미니버스 정류장. 막상 너무 쉬웠다.


MTR 출구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도니 줄지어 서 있는 미니버스들. 마침 출발하려는지 시동 켜길래 서둘러 놓칠세라 달려갔다. 버스 번호와 종착지를 또 한 번 앞에서 확인한 후 버스를 탔는데 와. 생각보다 너무 깔끔했다.


낡고 초라해 보였던 외관과 달리 회색빛 시트는 어디 하나 까진 것 없이 깨끗했고 버스 좌석 곳곳마다 나노 항균 소독 스티커까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내 옆자리엔 날씬한 학생이 앉아 주었다.

앞뒤 무릎이 간신히 들어가는 좁은 좌석에 30분은 타고 가야 하는지라 옆자리 누가 앉냐도 중요했는데

쾌적하고 여유 있게 갈 수 있겠구나 싶어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따뜻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하늘 아래 꼬불꼬불 산속 길로 버스는 들어갔다. 마치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


언덕배기에 이런 마을이 있었구나. 여기는 마치 사이판 같네. 외곽 지역은 여전히 개발이 한창이구나.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나타난 탁 트인 바다. 동남아 여행 온 기분. 아, 여기 홍콩이지 한국 아니구나.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니더라


점점 내릴 때가 가까워 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내리나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던 중 내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던 외국인 승객! 그는 모르겠지. 내가 탈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나와 같은 처지의 노란 머리 외국인은 어떻게 내리나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Next Bus Stop, 음꺼이~"


그렇다. 별거 아니었다. 그냥 넥스트 버스 스탑, 음꺼이.

너무 쉽잖아. 난 또 버스 정류장 이름 말해야 하는 줄 알고 근처 건물 이름 광둥어로 대야 하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이런 쉬운 방법이 있었어.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괜히 쫄았네.


다행히 많은 분들이 함께 내려주어

내가 직접 정류장을 외칠 일은 없었지만

이미 '넥스트 버스 스탑 음꺼이'를 듣는 순간

초행길의 심리적 부담의 벽은 와르르 무너졌고

미니버스는 더 이상 나에게 도전이나 모험의 대상이 아니었다.



안전한 길이란 게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에겐 매일 아침 출근길이었을 나의 초행길. 익숙한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일상의 한 토막일 뿐이었을 텐데 처음 경험하는 나에겐 별천지 신세계 탐험의 여정이었다.


안전하게 우버나 택시를 탈까 고민도 했었다.

근데 과연 우버나 택시가 안전한 길이었을까?

그냥 익숙해 편했던 건 아니고?


안전하기로 따지자면 시속 80km의 속도 제한이 있고

다른 사람도 함께 타는 미니버스가 더 안전할 수도 있었다.

인생의 갈림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안전하게 보였던 그 길이 과연 안전한 길이었을까.

그냥 익숙하고 편해서 택했던 길은 아니었을까.


누가 가 봤더니 좋더라 해서 갔던 길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누가 함께 가준다 해서 따라간 길은 아니었는지. 고민만 하다 끝내 발걸음이 향했던 건 늘 잘 알고 있는 그 길이 아니었는지.


아직 나도 오늘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제는 두렵지 않다 미니버스 타고 초행길 나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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