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_김영민
위트가 있었더라면...
이 작가의 위트가 나에게도 있었다면 내 삶은 좀 나았을까...
어느 날, 인생의 숙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살고 보니 진흙 늪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은 만나지도 않지만 과거 추석 때 만난 막내 고모부는 집요하게 내 걱정을 해댔다.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며 니 국수는 꼭 먹어야겠다는 그에게, 결혼은 무엇인가 국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했었어야 했다.
평생 엄마의 정성이 담긴 집밥을 받고 자란 나는 이것도 하나의 애정표현임을 배우고 자랐을 것이다. 결혼 후 애정의 표시로 주말 아침상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기대했건만, 설거지를 하느니 차라리 사 먹겠다는 남편인 줄 알았다면,
그릇뿐만 아니라 인생의 각종 설거지조차 함께하기를 어려운 사람인지 아닌지를 미리 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보이는 결과로 결혼'식'만 잘 끝내면 되는 게 아니라
그 과정 더 중요시했어야 한다는 문장은
내가 지나온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았다.
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게면 느끼는 4가지 부정 -분노-체념-인정이란 감정도 내가 미리 알았다면 덜 힘들었을까?
아... 난 지금 분노쯤에 와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체념하고 인정하면 끝나겠지라며 좀 더 초연 해질 수 있었을까?
빨리 체념하고 인정하면 끝나겠구나 라며 이 간격의 시간을 단축하거나 생략했을 수도 있었을까?
아니면 지나고 난 후 과거의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아.. 이때까지 부정했고 이제 체념했었구나! 하며 작가의 한 단어 한 문장을 곱씹을 수 있던 것인가..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 중에 부정적인 감정이 섞이게 되면 사실 대부분은 회피하거나 도망을 가고 싶어 한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절망의 늪에 빠져 천상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야 동정표를 얻을 수 있다는 본능이었던 것 같다. 이 늪은 누가 꺼내 줄 수가 없다. 그것은 늪이라는 사실만 알려줄 수 있다.
즉 선택한 스스로만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아버린 후 만난 책이어서 그런지 신랄하게 묘사하면서 마무린 위트로 웃음 짓게 하는 작가의 문장에 위로를 받았다. 별일이 별일이 아니게 되는 효과같이...
결혼과 육아와 맞벌이를 동시에 해오면서 알게 된 사실은 결혼의 적정 나이라 함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기에 건강한 나이로 정한 것인 결과론적인 사회적 편견이라는 것이다. 길에서 드러눕는 아이를 초연하게 컨트롤하며 안정적인 애착관계로 키울 수 있는 어른이 된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인 것이다.
물론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과 아이를 키우며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예 다른 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내 인생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 좋든 싫든 나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게 되고 나의 원가족을 돌아보게 한다. 왠지 모를 죄책감과 그리움과 애틋함과 분노 등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또 다른 모습의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십 번의 부정 ㅡ분노ㅡ 체념 ㅡ인정의 감정을 겪게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인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인정하며 받아들인 나는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리저리 치이다가 퇴근 후에 만나는 아이와의 함박웃음 속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스치듯 받는 걸 보니 말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면 행복한 줄 알았던 내가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