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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Jul 05. 2023

술의 역습

 

                                                            

순댓국, 홍어무침, 도토리묵… 유리 미닫이문에 안주 일체가 차려져 있다. 주택가 골목 허름한 선술집이다. 들어서는 우리를 주인아주머니는 본 체 만 체다.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또 얼마나 떠들어댈지 안 봐도 뻔하다는 눈치다. 우리가 읊어대는 시 나부랭이는 그녀에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게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업 후에 갖는 뒤풀이는 문학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폈다. 


수풀엣 꿩은 개가 내몰고 오장엣 말은 술이 내몬다더니 내장으로 흘러들어간 액체는 입으로 풀려 나왔다. 저마다 신세 한탄이 늘어지다 눈물콧물로 이어질 즈음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주머니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앗따, 골목 시끄럽소. 어지간히들 하고 가씨요.”

고함 소리에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눈치를 살피는 건 맨 정신인 나뿐이다. 더 험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등 떠밀려 나온 골목에는 가로등만 서 있다. 


술만 마시면 펑펑 울어대는 그녀를 부축해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처럼 층층시하도 아니고 돌봐야 할 어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 그녀는 매번 무슨 이유로 휘적대는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에게 세상은 답답한 곳인지 모르겠다. 애잔한 마음에 등을 토닥이는데 그녀가 내 손을 휙 뿌리치며 뼛성을 낸다. 

“만날 맨 정신으로 어떻게 살아?”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녀의 말이 서운하다. 비단 취하지 않은 것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게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매여 사는 내가 딱하다는 말로 들린다. 나라고 맨정신이고 싶기만 하겠는가. 폐부를 찌르는 한마디에 취해 휘청거렸다. 


P시인이 머무는 폐교에서 일박 세미나가 열렸다. 술자리 일행들과 버스를 타고 영월로 향했다. 창자같이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걸으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취하고 말리라 다지고 또 다졌다. 이번엔 못 마신다는 핑계도, 자리를 먼저 빠져나가야 할 이유도 없다. 버스에서 내려 전병에 막걸리 한 사발을 미리 마셨다. 세미나는 뒷전이고 뒤풀이 시간만을 기다렸다.


술이 술술 넘어간다. 내가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나를 마시고…의아하게 바라보는 그녀 앞에서 보란 듯이 거푸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간 액체가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얼굴 근육이 풀어지면서 실실 웃음이 난다. 뼈가 녹아내린 것처럼 몸이 흐물거리고 숨이 가쁘다. 봐, 나도 취할 수 있다고. 말을 하려는데 혀가 제멋대로 꼬인다. 교실 벽과 천장과 사람들이 빙빙 돌아간다. 속이 울렁거린다. 기다시피 밖으로 나와 속엣 것을 쏟아냈다. 욕지기가 날 때마다 내장이 딸려 나올 것만 같다. 턱이 덜덜 떨려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드니 눈앞에 옥수수 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가느다란 몸에 어쩌자고 옥수수를 저리 달고 있는지. 등에 업힌 열매가 제사상에 올라 있는 메 아홉 그릇 같다. 나는 비틀대며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옥수수를 따냈다. 까슬거리는 잎사귀가 맨살을 스친다. 세월이 가도 삼대독자 며느리 자리는 마파람에 흔들리는 옥수수 잎처럼 서걱거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땅 위로 솟은 뿌리발이 걸린다. 옥수수 대를 붙잡고 비치적거리다 밭 가운데 꼬꾸라지고 말았다.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니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뭐라고 정신 줄을 놓지 못하고 살았던고. 


알코올의 체내운명이 끝난 아침, 일행들이 나를 보고 키득댔다.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하는 내게 그녀가 다가와 “너 토하기까지 했구나.”라며 물수건으로 얼룩진 옷을 닦아 주었다. 맨 정신이라는 말이 나를 얼마나 말짱하지 못하게 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 말에 걸려들어 술로 승부를 보려 했던 나는 술에게 역습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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