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옷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여리한 속살이 눈부시다. 무더기로 뽑혀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부려졌을 때만 해도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땅에서 바지런히 물을 뽑아 올리던 뿌리만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풀어헤친 대가리에 칼을 대자 제 몸에 붙어있던 흙이 까인 살에 피처럼 엉겨 붙는다.
추수가 끝나고 밭에 남겨진 파는 찬바람을 피해 뿌리로 겨울을 버티다 봄기운에 고개를 내밀었다. 햇빛을 끌어당기던 연둣빛 줄기는 나날이 몸을 부풀렸다. 구붓구붓한 여인들이 뿌리가 잘려나간 파 앞으로 모여든다.
“아무나 해주는 거 아니야. 농사일이 서투니까 도와주는 거지.”
둘러앉은 여인들의 머리가 파뿌리를 닮았다. 마디가 불거진 투박한 손으로 가느다란 쪽파 줄기를 날쌔게 낚아챈다. 가뭄으로 비틀린 몸이 꼼짝없이 붙들려 겹겹이 두른 옷을 벗는다. 차마와 속치마, 속바지를 들추자 푸르고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여인들의 눈길이 아련하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여인이 한 꺼풀 제 신세를 벗겨낸다.
“없는 집에 새끼들은 줄줄이 태어나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살림이 펴지질 않는 거야. 새끼를 그만 낳는 게 수다 싶더라고. 읍내 병원에 가서 루프시술을 받고 오는 데 어찌나 아프던지 그 길로 빼 버렸지 뭐야. 그 바람에 막내가 또 생겨 일곱이 돼버렸어.”
자식들 입에 풀칠을 면하게 하려고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땅에 살을 묻었다. 효자 노릇하는 막둥이를 안 낳았음 어쩔 뻔했냐면서도 껍데기만 남은 세월에 한숨을 토해낸다.
맏언니뻘 되는 여인이 그럴 거면 합방을 말아야지 뭔 소리냐며 퉁바리를 놓는다. 한창나이에 떠나버린 남편은 그녀에게 흐르지 않은 시간이다. 뒷밭에 묻힌 남편을 만나러 언덕을 오르는 것은 부부의 연을 다 하지 못한 때문일까. 인물도 훤하고 얌전하던 그 양반 자랑을 늘어놓는데 목구멍에서 숨이 그르렁댄다. 곱상한 얼굴이 발그레해 보인 건 내 착각일까.
그 틈에 한 번도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여인이 끼어든다. 이래 봬도 자식이 여섯이라며 말을 할 때마다 움푹 들어간 입과 볼이 실룩거린다. 지난 장에 쪽파 내다 팔고 쉐타 하나 사 입었다고…분홍색 꽃무늬 속 동글동글한 얼굴이 까놓은 파처럼 수줍다. 한 단에 오천 원은 받을 요량이었는데 더 큰 단을 삼천 원에 팔더란다. 번 것보다 쓴 돈이 많다면서도 새로 장만한 옷을 매만지며 연신 벙글거린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을 옆구리 찔러서라도 듣고 싶은 여심에 맞장구를 친다. “머리숱도 많고 이렇게 귀여우신데 사람들 눈이 삐었나 봐요.”라는 내 말에 벌어진 입 속 하나 남은 이가 장식품처럼 덜렁댄다.
허물 벗듯 내던지는 여인들의 사연이 껍질 위로 차곡차곡 쌓인다. 그들이라고 윤기 흐르던 시절이 왜 없었겠는가. 어디부터가 속살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파처럼 때를 놓치고 만 것은 아닌지. 세상의 움직이는 모든 유기체들에겐 알맹이와 껍데기가 있었을 터. 그나마 꽃대가 올라온 파는 대궁에 제 몸을 다 내주고 알맹이 적 흔적만 남아있다. 남의 껍데기를 벗기는데 선수인 나는 입도 뻥긋 못하고 여인들의 세월을 삼킨다. 알근알근하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무덤처럼 쌓인 껍질을 밭에 훌훌 뿌린다. 껍데기여 가라. 아니, 파릇한 모습으로 껍데기여 다시 오라. 해를 등지고 앉은 여인들은 매운 냄새에 눈을 찡그리며 저마다 잃어버린 시간을 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