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문화의 전당
오늘 문득, 청렴연수원 수기 응모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청렴이란 단어가 늘 내 곁에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저께 군수사령부 청렴 관련 포스터 낙방 소식에 좀 실망감도 있었지만, 다시 청렴에 대한 활기가 솟아났다. 우리 아들이 그린 포스터라 더욱 애착이 갔지만, 이제는 청렴 관련해서 내가 직접 수기를 쓰니 좀 쑥스럽기까지 하지만 청렴에 관한 이대로 물러서기가 많은 아쉬움이 남기에 용기를 내어 써내려 간다. 꼭, 수상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만 천하에 알리고 싶다. 그리고 지금, 군수사령부 품질검사실 조달품 검사 2 과장으로서 우리 과원들 즉, 검사관들에게 늘 청렴교육을 시키고 있는 데, 그 가운데 핵심 내용이 청렴은 검사관들에게 절대적이며 생명과 같은 사명감과 의무감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청렴은 <곡식에 제비> 같아야 한다고 함축성 있는 이야기를 곧잘 하고 한다. 매일같이 업체를 대하는 검사관들이야말로 청렴!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각종 유혹과 협박에 시달리는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는 현장 속에서 결코, 살아남기 위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시고 10여 년 세월이 지났다.
어릴 적에 우리 집은 엄청 궁핍한 가난 속에 살아왔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아버지가 시골에서 내려오셔서 부두에 막노동을 하셨고, 어머님은 거동이 불편하신 몸으로 5남매를 힘들게 키우시고 매 끼니 걱정하시며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오셨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쌀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꽁보리밥은 고사하고 매일같이 먹는 경 시기 죽에 늘 배가 고팠다.
추운 겨울에는 난방 시설이 전무해 겨울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다락방에서 공부할 때쯤이면 늘 어머니께서 춥다고 발밑에 유담포를 밀어 넣어 주시면 언 발을 녹였다. 그리고 잘 때에도 어머니와 내가 각각 유담포 하나씩 품에 안고 잤는데 잠자고 일어날 때도 어머님 유담포가 발아래 놓여 있어, 어머님은 주무시는 동안에도 늘 나를 생각하셨다.
학비를 못 구해 항상 애로가 많았는데, 한 번은 공납금 납기일을 어겼다고 선생님이 출석부로 내 머리를 후려칠 적엔, 아픔보다 급우들이 지켜보는 상황이 더욱 창피스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거짓말도 한 것도 아니고, 어머님께서 공납금을 못 구해 여기저기서 알만한 데는 다 돌아봤지만 그리 쉽게 돈을 마련하지 못해 자꾸만 늦어진 것인데...
집에 와서는 일체 어머님께 알리지 않았다. 왜냐면 어머님께서 너무 맘이 아플 것 같기에 그냥 모른 체 했다. 말을 한다는 그 자체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공납금 구하기도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항상 송구스러웠다.
나는 빨리 실습 나가서 돈 벌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런 가운데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군무원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1978년 12월 16일 9급 군무원으로 임용되었다.
한 번은 92년도 도시계획 정리로 집이 철거되면서 내가 군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더 큰돈을 벌어야겠다고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 어머님께서 정색을 하시며 내게 하시는 말씀이 “애야! 참새는 곡식을 함부로 먹지만, 제비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곡식을 먹지 않는다. 난, 곡식에 제비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너희들 때문에 늘 감사하고 행복하단다. 그러니까 그대로 군무원 생활을 하고 적지만, 그 봉급으로 살아도 행복한 것으로 생각을 하면 된다.”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이름도 정열이라고 지어 주신 이유도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 말씀이었다.
그래서 잠깐, 큰돈을 벌려고 사회로 나가려고 했었던 것이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군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어머님께서 《곡식에 제비같이》 살면 아무 걱정 없다고 늘 강조하셨다.
나 역시 그런 어머님 말씀을 지금까지 항상 잊지 않고 살아왔으며, 지금 현재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지탱하게 해 준 강한 어머님의 정신이 있었기에 나는 열정과 긍정, 그리고 항상 희망 속에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면서 어려움과 힘든 순간이 있을 때마다 어머님의 강한 정신을 생각하고 더욱 힘을 내서 위기 때마다 잘 대처해 왔다.
또 한 번은 어머님께서 거래하는 생선 파는 아주머니가 집에 와서 생선을 팔고 간 후에 꼬깃꼬깃 접은 돈 만원 한 장이 방에 떨어져 있길래 난 즉시, 주워 아주머니께 돌려주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이미 가시고 없었다.
그 당시에는 전화가 없기에 다음에 오시면 꼭 전해 줄려고 보관하였다. 다시 아주머니가 오셔서 전해줬더니,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리고 수년 전 우리 아들도 비슷한 일을 했는데, 해운대 아르바이트할 때다.
일본 관광객이 우리 아들에게 수고했다고 팁을 줬는데 고스란히 돌려주어 일본 관광객뿐만 아니라 호텔 관계자들도 무척 자랑스럽다고 전하며,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 정말 마음에 쏙 든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군대 제대해서 아직 취직이 안되어 집에서 공부만 하고 있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고 나름대로의 확고한 삶의 가치관이 있어 앞으로 잘 될 거라고 우리 아들을 믿는다.
올해 7월 초, 군수사령부가 주관하는 청렴콘텐츠가 있어 아버지와 아들이 협찬해서 우리의 청렴이 3대째 내려오는 것을 자랑하자고 당당히 응모 하기로 해서 아들이 그림을 잘 그려 포스터로 제출했고 접수가 되었다.
물론, 우리 집 가훈인 《곡식에 제비같이》 갈자는 문구로 작성하였다.
우리 사무실에도 먼저 알리고 내가 청렴 관련 포스터를 청렴콘텐츠에 낸다고 하니, 우리 과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찬성하며 꼭,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며 과장을 믿고 응원을 하는 모습에 무척 고무되었다. 특히, 청렴에 관한 누구보다도 더 열성적인 검사관들이기에 그렇다. 아들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까지 듣고 나니 더욱 힘이 났다.
8월 초 발표가 났는데 아쉽게도 낙방이 됐다고 알려줘 사실 좀 실망을 했다. 우리 아들은 실망하지 말라고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했다.
‘제비는 날아갔지만, 청렴이란 그 제비는 우리들 맘속에 영원히 남아있고 특히, 아버지의 자리가 청렴 관련 아주 중요한 자리이기에 청렴을 더욱 알리고 교육시키며 실천해야 한다.’ 고 말했다.
우리 과원들도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고 나를 독려했다.
청렴콘텐츠가 끝난 게 아니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더 열심히 해서 다시 도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 과원들이 나를 믿고 절대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니, 용기를 내어 다시 청렴콘텐츠에 수기를 응모했다. 처음 포스터 응모를 낼 때와 같은 마음으로 수상에 연연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우리 사무실, 우리 집 등 공동체로 작품을 낸다. 우리 검사관들도 《곡식에 제비 같이》를 정말 이해했다.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다. 우리 과원들이 있어 행복하고, 곡식에 제비 같아서 행복하다.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남부럽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이유가 어머님께서 늘 강조했듯이 《곡식에 제비같이》 살아왔기에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고 또한, 어머님 말씀이 우리 집 가훈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청렴한 생활 속에 청렴한 정신이 깃들어 청렴한 습관이 대를 이어 청렴하게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청렴! 《곡식에 제비같이》 다시 상기하며 삼 대째 이어온 이 문구처럼
우리 가족, 직장,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 전체 청렴문화가 굳건히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에필로그
이 글쓰기는 제가 공직생활 40여 년 재직 중에 우연히 청렴콘텐츠 수기 응모를 하며 처음으로 글쓰기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름대로 소중한 뜻깊은 글이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 글쓰기가 원동력이 되어, 이 글쓰기를 바탕으로 퇴직하면서, 인문학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었고 강변 문학회에서 시낭송도 하며, 향토사연구소에서 ‘미륵사와 부모은중경’이라는 글도 집필, 기고하였고 브런치까지 오게 되었네요.
여하튼 이 글은 그만큼 나에게 특별한 글이기에 목차 순서에 맨 처음으로 정했어요.
마지막 ‘참나’를 찾아서의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강한 영향을 주고 주제를 더욱 명료하게 밝혔답니다.
목차 단원별 내용이 ‘그게 그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비슷하여, 아직 애송이 작가라 직접 경험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토대로 엮는 내용일 수밖에 없음을 널리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