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힘
프롤로그
필자는 요즘 가족의 해체, 가족 간 불화 등 소중한 가족이 자꾸만 소원해져 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가족의 소중함, 가장 기초적 사회조직이기에 중요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 봤어요. 가족에게 자존심, 갈등, 배려, 존중을 다루고 또한 책임도 주문을 하였습니다. 등장인물 또한 실제 가족입니다.
가족은 하나의 울타리이며 또 하나의 생명이고 물질문명의 투쟁 속에 마지막 피난처이고 유일한 안식처라 생각하며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소중한 가족, 행복한 가족이 되어 이 험난한 시대에 조밀하게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써봅니다.
만남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는 처참하게 불난, 흉물스러운 건물이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큰누나가 위태롭게 들락날락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나의 딸 희정이가 삼촌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누나를 만나러 밀양으로 기차 타고 가면서 창밖을 보니, 풍경과 함께 누나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과거가 스케치되었다.
도착해서 불난 집과 누나가 기거하는 방을 보니, 한마디로 참담했다.
누나와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만났다.
밀양 상동 금산마을에서 전원생활하던 중에 갑자기 불이 났다고 한다. 조립식 패널 집에 불이 붙었다. 집은 모두 전소되었고 누난 다행히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누가 불을 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나는 방화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말로는 누나가 작은 누나를 내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저질렀다 는 이야기도 있고 한편으로는 누나가 치매끼가 있어 실화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주변에서 들린다.
즉,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다. 내게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조카 희정이다. 희정이는 큰누나 딸로 총명하고 성실하며 정직하다.
몇 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잘 치유하는 중이다. 새해에나, 명절에 꼭 안부 전화를 빠뜨리지 않고 연락을 준다.
어쨌든 희정이가 삼촌인 내게 엄마가 찾는다고 연락했기에 일단, 누나를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안정을 취하게 하고 복구작업을 문현동 형과 함께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되니 이번에는 누나 노후생활에 대한 가족들 간 불협화음이 터지고 아들 내외는 계산적이고 누나에게 아무런 방법을 제시 못한 상태에서 딸인 희정이가 그래도 엄마를 수시로 챙겼다. 희정이는 암과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 엄마를 챙겨 참으로 기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가족과의 마찰은 늘 희정이에게 해결을 원하고 희정이는 엄청 힘들어하며 삼촌인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
결국엔 내가 도와주는 것으로 해결이 어느 정도 되었지만, 부모 자식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서기가 뭐했고 이 일을 언제까지나 해야 하나 나로서도 참 난감했었다.
어쨌든 밀양에서 복구 작업을 하면서 수시로 누나와 지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내가 보관하고 있는 ‘엄마 편지’를 누나에게 보여 줬고 직접 읽어 줬었다.
어머니 편지
‘어머니 편지’는 작은 누나가 가족들에게 애를 한참 먹일 때, 어머니께서 내가 아들만 낳고 딸들은 낳지 말았어야 되는데 하시면서 내게 받아 적어라고 하였다. 그때가 어머니 73세 때였다.
잘 읽어 보아라. 내가 벌써부터 생각해온 것을 이제 말하겠다.
그전에는 전부 자식들이 스스로 잘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는 모습이 기대에 못 미치는구나.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상세히 말하겠다. 물론, 내가 지나온 것에 대해 대충이야 알겠지만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온 이야기를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내가 겪었던 일부라도 깊이 새겨
항상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도록 하여라.
내 나이가 16살 일 때, 결혼식은 6월 22일 올렸다. 나이가 너무 어려 위안부를 내어
주지 않아, 1년이 지나 17살에 일본으로 시집을 들어갔다. 부모님도 물론 형제,
친척들도 볼 수가 없는 데다 글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도 않는 일본 땅에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눈물만 나는 게 아니라 죽고만 싶었다.
거기에다 홀 시아버지 한분, 신랑이 22살, 큰 시동생이 17살, 둘째 시동생이
14살, 시누가 12살, 화명동 막내 시동생이 7살이었다.
그리고 이불이 각각 2채씩 모두 14 채였다.
이불을 빨면 3일이 걸리고, 또 이불을 꾸미며 3일이 걸렸다.
이러한 생활을 계속해 나갔는데, 나이가 22살 일 때 원자탄이 일본 떨어졌는데
히 호시 마 1개, 나가사끼 1개씩 터졌다.
그때, 온통 불바다고 유리조각 더미 속에서 헤매며, 우선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집 밖에 뛰쳐나와 보니, 개천가에는 시커멓게 탄 시체들이 많았다.
정신없이 도망가야 살 수가 있었기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일본에서 나왔다.
나중에 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살 먹은 순자와 화명동 시동생도 따라 나왔다.
조선에 와서 친정에 한 달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갈려고 했는데 조선사람은
일본에서 전부 나오고, 일본 사람도 역시, 전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문과 함께 영원히 일본으로 갈 수 없다는 말에 낙담이 컸다.
친정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가 없고 어쨌든, 혼자라도 살아가야 하기에
공장에 취직을 하려고 부산에 왔다.
어째, 처음부터 쌀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쯤, 매축 오촌 아주머니 소개로 성주 어른을 만났다.
이쪽 집안 역시, 찢어지는 가난 속에 전부 식솔들이 빈대만 붙어살고
하나같이 걱정거리만 내게 안겨 주었다. 그래서 내가 아니면 도저히
생활이 될 수가 없고 설사, 생활이 된다 해도 집안 살림은 엉망이 이었다.
정말 식구들 하나같이 빈대만 붙이는 꼴이지, 일을 하거나 일을 돕는
사람이나 나가서 돈을 벌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식구, 친지들 그렇게 많이 붙어살아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인간은 없고
말 한마디 좋게 하는 인간 없고, 매일같이 서로 욕질하고, 싸우며 맨날
남 비방만 하는 게 그 식구들 하루 생활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제일 처음 밀양 가서 됫박 하나 사서, 쌀을 4말 사고 부산 와서 소매를
내니, 쌀이 4되가 남았고 1말에 25원씩 돈이 남았다.
또 청도로 가서 쌀 4말을 사고 부산 와서 소매를 내니, 3되 반이 남고
1말에 20원이 남았다. 이렇게 장사를 하면서 약목도 가고, 경상도 가고
왜관까지도 갔다. 경산에 가서 쌀 4말을 가져오니, 남는 것이 하나도
없고 본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를 4접 가져와서 소매를 내니깐, 4접 전부 25원인 남았다.
이렇게 사과장사를 할 때쯤 정자를 낳았다.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고, 매일같이 5원씩 하는 국수로 하루 한 끼
때웠다. 밥이 10원 하니,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또 구미도 가고, 김천도 가고 그렇게 갔지만 제일 많이 남는 곳은
밀양과 청도였다. 이렇게 쌀장사한 게 30살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또 고기 장사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영도에 가서
수루 메 100마리를 사 가지고 머리에 이고 오면서, 집집마다 다 팔고
매축까지와 계산하니, 50원이 남았다.
계속해서 고기 장사를 하면서 정이를 낳을 때쯤, 부대 근처에 집을 샀다.
그러나 곧, 집을 철거한다 해서 다시 팔아 성주에 논 2마지기를 샀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기차 타고 쌀자루가 터져 고생한 이야기, 식당에
고기 한 접 더 넣으려고 애걸하며 붙잡고 널어진 이야기 등은
하려면 너무너무 많아 태산 같고, 말로 글로도 끝을 못 맺겠다.
여하튼, 그때는 잠도 하루에 2시간밖에 못 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차를 타서 장사 끝내고 밤중 10시에
집에 들어와서 공동수도에 물 받으려고 줄을 서서 받아와,
그 물로 빨래하고 나면 딱, 새벽 2시가 되었다.
사소한 이야기는 빼고 매일 일어나는 생활이 이랬다.
또, 동래에서 미나리 200단을 사 가지고 머리에 이고 장사했는데
이때는 몸이 붓고 눈앞이 노랗게 빙빙 돌아갈 때가 많았다.
전차를 태워주지 않아, 신작로를 걸어가는데 군인들 지프차가
옆에와 타라고 해서 탔는데, 매축에 와서 내려줘 너무너무 고마워
눈물이 났다. 정말, 그때는 군인들 덕 많이 봤다.
미나리 한 단에 1원씩 받아오면 1원 50 전이 남으니, 쓰러져도
어떻게든 일어나 가야 돈을 벌지 않았겠느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 다만,
좀 변한 게 있다면 교통이고, 사람들이 많이 편리해진 생활뿐이다.
여자는 옛날부터 더 힘들고 어려웠다.
내가 보기에는, 요즘은 여자는 거의 남자와 똑같은 대우받는다.
아니, 남자보다 더 대접 잘 받는다.
이런 세상에, 내가 게으른 여자와 잘 살아가지 못하는 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내 자식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도 매 한 가지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73살이지만
그때를 비추어, 마음가짐은 몸이 훤하니 당장 많은 돈을 벌고
세상에 얻고 싶은 것 모두가 얻을 수 있다 생각하지만,
몸이 이러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참으로, 마음만 빤하면 뭐 하겠느냐. 그래서 몸이 조금이라도
성할 때, 젊은 시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 얼마나 좋은 세상이고 좋은 세월이 아니냐.
원하는 대로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자기가 원하는 세상이
될 수가 있다. 참, 할 말은 하자면 끝이 없고, 태산 같고
죽을 때까지 글을 쓰도 숨이 안찬다.
딸이고, 며느리고 간에, 여자들은 어느 집, 어느 장소에 가도
접시 위에 물방울 구르듯, 깨끗하고, 반듯하고, 빛나야겠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집안 일과 생활에 큰 어려움을 어떻게
잘 이겨 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라, 저 자신과의 진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할 말이 끝이 없고 태산 같지만 이만 그치겠다.
잘 새겨듣고 너희들에게 꼭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어머님 편지를 읽고 누나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좀 많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작 편지를 받을 사람은 작은 누나인데, 큰누나가 받은 꼴이다.
사실과 진실
누나가 한이 많은지 엄마 편지와 함께 내 일생도 같이 자서전을 써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며, 누나의 그동안에 있었던 얘기를 자장가처럼 들었다.
자서전이던, 수기던 간에 어머니와 누나는 한 국가의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면서 인생의 고난이 예고되었다.
‘누나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단 ‘누나의 이야기’를 말하자면,
누나는 1945년생으로 해방둥이다.
태어난 곳은 일본 히로시마 겐카이라고 한다.
누나 친아버지 박 씨가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고, 형제는 위에
3살 많은 오빠가 있었는데, 히로시마 원폭 때 사망했다고 말했다.
원폭 후,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나와 진주 고모집에서 5살까지 살았고
어머니가 의붓아버지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 형제들에게 학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아원에 맡기고 입양을 원했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게 입양이 불발로 끝나고 다시, 의붓아버지
밑으로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생과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총명
하며 순발력이 뛰어났다고 주위에서 그렇게 혀를 내둘렀다.
‘치영, 저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닌 천재다!’라고 말했다.
의붓아버지는 국민학교도 보내주지 않았지만, 동네에서 친구들 명자, 영숙이
등 경남여고와 동주여상 다니는 애들을 주도하고 이끌었다.
내 꿈은 부자가 되는 게 유일한 꿈이었고, 항상 열심히 사는 것이었다.
처녀시절에는 엄마가 아파서 늘, 병간호하며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그런 와중에, 의붓아버지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도 보살펴 주어야 했다.
특히, 막냇동생이 다리에 악성종양으로 고생이 심했고, 치료를
위해서 더욱더 애착을 가져야만 했었다.
25살에 천 씨(남편)를 만나 몇 년간 교제 끝에 시집을 갔다.
시집은 부잣집으로 천금당이라는 금방을 해서 돈이며, 금 등 물량공세에
내가 결혼을 승낙하고 부잣집 아들과 꿈같은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시집식구, 특히 큰 시누이에게 엄청 시달렸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악질이었다.
힘겨운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유일한 희망인 내 자식 들을 훌륭하게 키워야
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혼자서 가계(간판업), 가족 뒷바라지, 집안
살림살이 등 모두 다 책임을 지고 가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서 진학, 학원, 교육비 등으로 더 큰돈을 벌어야 했다.
큰아들 군 입대하고, 둘째, 딸은 대학교에 가고 막내아들은 고등학교에 갈 때에
내 나이 47세 일본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
그곳에서 돈을 위해 온갖 어렵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쿄 근교의 술집 및 식당과 김치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하루 3시간
정도 잠을 잘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벌이에 희망과 꿈이 곧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수시로 다치는 일도 있었지만, 돈벌이를 위해선 이겨낼 수 있었다.
술집 식당에서 오후 16시까지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7시에 퇴근하고
다시 김치공장에 8시까지 가서 오후 13시에 퇴근하고 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출근하면 잠은 딱 3시간밖에 잘 수밖에 없었다.
술집 식당에서 늘 이렇게 힘든 생활을 반복되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유학생
등 한국사람으로 내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10년간 돈을 버니, 계획했던 만큼은 되어 일본에서 나왔다.
그때가 57세였는데 막상 나와보니 내가 돈을 벌어서 송금한 것은
흔적도 없어, 낙담이 컸다.
얼마만큼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남편이 도박에 빠져 악착같이 벌어다 준 돈을 탕진하고 말 그대로 살림은
희정이가 맡고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쨌든 다시 이를 악물고 우선, 딸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또 돈을
벌어야 했기에, 울산 커피숍, 동래 커피숍, 카바레 식당, 장어집, SK주방 등
별의별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다하고 8년 동안 닥치는 대로 했다.
그 악착같은 노력으로 딸 희정이, 막내아들까지 결혼을 다 시켰다.
여기까지 누나의 독백을 글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큰누나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