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아빠의 유골함을요.
아주 어린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섯 살 터울인 동생이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 아마도 다섯 살 즈음의 꼬마였을 것이다.
큰 이모댁의 피아노가 놓인 작은 방에서 그 어린아이가 목놓아 울었다.
보통의 다섯 살 꼬마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서럽게 울었다면, 나는 엄마를 다시는 못 만날 거라는 두려움에 울었다.
엄마가 아빠와 이혼이라는 것을 한다고 했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알았다.
나는 아빠와 살게 될 것이고 엄마를 영영 볼 수 없을 것을 두 글자로 줄여 부른 말이라는 걸.
“나는 아빠랑 살기 싫어, 엄마랑 살고 싶단 말이야.”
“엄마, 가지 마. 엄마 보고 싶어.”
고작 다섯 살 난 아이가 가진 모든 어휘력을 총 동원해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그리고 막 자유로워지려던 엄마는, 아른거리는 딸의 울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지옥 같은 삶으로 돌아오길 선택했다.
꼬마였던 나는 마냥 기뻤고, 그보다 자라난 나는 미안했다.
괜히 엄마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며 우는 통에 엄마의 옷자락을 놓아주지 못하고 붙잡은 것만 같았다.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려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아빠의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가정폭력, 그리고 외도.’
엄마가 눈을 질끈 감고 그날 떠났다면, 엄마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답지 못한 남편에게 욕을 듣지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남편을 참고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도박빚 가득한 가정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이곳저곳에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돈을 빌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교회에서 나눔 하는 옷들을 주워 입으며 살지 않아도 됐었을 것이다.
식물인간이 된 둘째 딸을 간호한답시고 아름다운 청춘을 다 바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여자로, 한 아내로 존중받을 수 있었던 엄마의 삶을 내가 망친 것만 같아 미안했다.
아빠가 외도하는 현장을 찾아갔던 날, 엄마는 가정을 위해 무릎을 꿇었고 아빠는 희야인지 뭔지 하는 그 여자를 의자에 앉혔다. 엄마는 다리를 꼬고 앉은 그 여자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동생을 병원에서 간호할 때조차 술에 취한 아빠에게 맞았다. 돈 내놓으라며 주먹을 휘두르는 아빠를 피하다 옷이 찢어진 채로 로비를 뛰어다녔다.
심지어 엄마가 뇌출혈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빠는 간병 같은 것에 전혀 관심 없었다. 경마장에서 돌아와 택시비를 내놓으라고 욕을 했다. 그때 엄마는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서 빡빡머리를 한 채로 소변줄을 꽂고 누워있었다. 엄마는 ‘우리 엄마는 머리를 빡빡 밀어도 너무 예쁘다, 두상이 너무 예뻐.’라는 내 말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엄마가 이 모든 것을-사실 이보다 더 한 일들을- 참고 견딘건 나와 동생때문이었다.
2009년, 엄마가 집을 나가기로 작정한 날은 나의 대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나는 서울의 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엄마는 식물인간인 동생과 집에 남겨졌다.
아빠의 악랄한 폭주가 시작될 때 엄마는 이제 오롯이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 역시 그런 엄마를 혼자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정말로, 엄마는 아빠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007 작전을 짰다.
아빠가 집을 비우는 날이 오면 엄마는 동생을 집 근처 병원에 두고 집에서 도망을 나오기로 했다.
신도 엄마와 나의 계획을 돕는지, 자랑스러워하던 큰 딸의 대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아빠는 경마장에 갔다.
아빠는 경마장에 한 번 가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곤 했다.
보통의 아빠라면 가족끼리 따뜻한 한 끼 식사라도 같이 했을 터였다.
서울로 올라가 혼자 독립을 이룰 큰 딸이 대견하고 애틋해서 차마 보내는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아야 했다.
용기가 없어 늘 아빠에게 맞서지 못했던 엄마가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집 근처 병원에 동생을 입원시키고, 옷 몇 가지를 챙겨 무작정 큰 이모댁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머무는 쉼터에 들어갔다.
엄마가 기차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려고 할 때, 집에 돌아온 아빠는 엄마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엄마는 당연히 받지 않았다. 얼마나 가슴이 쿵쾅쿵쾅 떨렸을까.
내게 걸려온 아빠의 전화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깜짝 놀라하며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던 아빠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때부터 헛소리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바람이 나 자식을 버리고 나간 나쁜 X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친가 친척들에게도,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에게까지 그렇게 말했다.
아빠의 평소 행실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엄마를 욕하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다들 엄마가 잘 떠났다고 얘기했다.
아빠는 엄마를 잡으러 가야겠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마를 찾아내려고 악을 썼다.
한 번은 서울에 있는 내게 친척언니가 전화를 했다.
아빠가 큰 이모댁에 찾아와 엄마가 어딨는지를 알려달라며 난동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도무지 통제가 안되는데 그나마 아빠가 네 말은 들으니 빨리 택시를 타고 오라고 했다.
서울에서 전라북도의 어느 지역까지 곧장 택시를 타고 달려 내려갔다.
아빠를 진정시키고, 경찰을 대동하고서 엄마와 아빠가 만났다. 아빠가 엄마에게 건넨 첫마디는 ‘집문서 내놔.’였다. 엄마는 그 때라도 아빠가 잘못했다고 얘기했다면 동생을 위해서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라 했다.
아빠는 적반하장으로 집문서만 주면 더 이상 널 안 찾겠노라 하며 집문서를 가지고 돌아갔다고 한다.
엄마는 위치가 노출 됐기 때문에 그 지역 쉼터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다른 지역의 쉼터로 옮기게 되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였다.
엄마와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면서도 아빠에게는 엄마의 생사를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
꿈속에서도 엄마와 아빠가 마주칠까 전전긍긍하며 엄마를 숨겨주었다.
2015년에 동생이 17년간의 식물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천국의 천사가 되는 날, 엄마는 10년을 간호했던 사랑하는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올 수 없었다. 여전히 살기가 등등한 아빠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보내온 15년의 도망자 생활은 올해 4월 11일에 아빠가 세상을 떠나며 끝이 났다.
아빠의 장례를 치른 나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엄마는 더욱 실감이 나지 않을 터였다.
“엄마, 아빠가 떠나니깐 마음은 어때?“
“..뭐가 어쪄.. 그냥.. 미워할 것도 없지 이제는 뭐…”
‘아빠를 용서하는 것‘, 그것은 내게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엄마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엄마는 그 어려운 일을 덤덤하게 또 담담하게 해냈다.
지옥 같았던 결혼 생활마저도 은혜였다고 고백했다.
엄마는 아빠를 정말 용서했다. 아빠를 향한 모든 미움도, 분노도, 증오도 다 신의 손 앞에 내려놓았다.
엄마가 15년 만에 아빠를 만났다.
정확히는 아빠의 유골함을 만났다.
엄마도 나도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빠가 만든 지옥 속에서 살던 엄마와 나에게는 아빠가 떠난 그날이, 아주 오래 묵혀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날이었다. 나는 아빠가 떠나고 난 후로는 엄마를 숨겨주느라 스파이짓을 하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
아빠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
‘덜컹,’ 흔들리는 것이 기차인지 나와 엄마의 마음인지 모를 움직임이었다.
아빠의 유골함 앞에서 다시 한번 엄마의 마음을 물어봤다.
“엄마, 아빠를 보니깐 마음은 어때?”
“..뭐가 어쪄.. 아프지 않고 편하게 잘 있겄지..”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기 전 엄마는 아빠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잘 계슈.”
나는 다 알지도 못할,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아빠를 향한 엄마의 마음이 세 글자 속에 담겨 아빠의 유골함 위로 흩어졌다.
한 때는 사랑했을 것이며, 한 때는 미웠을 것이며, 한 때는 두려웠을 것이며, 한 때는 잊으려 애썼을 것이다.
내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엄마의 속마음은 엄마가 친하게 지냈던 전도사님(전도사님도 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을 겪으셨다.)을 만난 후에야 밝혀졌다.
“전도사님, 나도 이제 해방이에요.“
아빠가 떠난 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슬픔과는 별개로 엄마의 해방에 기쁨의 박수를 보낸다.
내가 엉엉 울던 날 엄마가 내게 다시 돌아와 주었기 때문에 나는 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엄마는 내 등대이자, 내 인생의 등불이다.
엄마는 나를 위해 버텼고, 나는 엄마를 위해 버텼다.
우리는 서로의 구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