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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지 May 07. 2024

꼭 노동청에 고발을
당해야만  알아들으시겠어요?

뉴질랜드 노동청 고발기

내가 뉴질랜드를 떠났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이 싫어서였다. 한국에서 내 또래들처럼 살아가려면 당연히 일을 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회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더 이상 회사 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해야 하는 한국에 대해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백패커에 있을 때에도 한국인들과 말도 섞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또한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기가 싫어 구직활동 대신 자원봉사를 택했다. 

 그렇게 철저히 한국인을 피하고 돈 버는 일을 마다하더니 결국 한국인 남자친구를 만나고, 한국인 고용주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3개월쯤까지는 내 고집이 유효했지만 내 삶의 모든 선택지에서 계속 ‘한국’과 ‘일’을 거부한다면 그건 아집이 될 수도 있고, 내 기회의 크기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남자친구였던 케이는 플랫 뷰잉을 갔다가 처음 만났다. 중국인이 공장처럼 운영하는 플랫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 방향이 같던 우리는 같은 백팩커에 묵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말문을 트게 되었다. 나는 외국인 플랫을 구해서 백팩커를 떠나게 되었고, 그와 그의 친구는 한인 플랫을 구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농장 일을 구해서 남섬인 블레넘Blenheim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송별회까지 해서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런데 블레넘으로 내려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다시 오클랜드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이전시 매니저한테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뉴질랜드나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오는 워홀러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워홀러들에게는 농장이나 공장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몇 개월간 여기서 일을 하며 돈을 바짝 벌고 남은 기간 여행을 하려는 계획을 많이들 한다. 문제는 이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농장이나 공장은 주로 지방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곳까지 가기 위한 차비와 숙소비 등을 투자하게 되는데 일을 구하지 못하고 허탕을 치기가 일쑤이다. 일을 구했다 하더라도 케이처럼 악덕 매니저가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국 케이는 매니저를 노동청에 신고했지만 돈을 돌려받기까지 꽤 많은 시일이 걸렸다. 

 이후 케이는 오클랜드에 머물며 한국인이 운영하는 건설일을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인 사장이 개인적인 문제가 생겨 또 임금을 못 받는 사태가 생겼다. 그는 다시 노동청에 신고를 해서 조정신청까지 받으며 몇 달 만에 겨우 돈을 받아냈다.      


 이런 일은 비단 케이만의 무용담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 역시 노동청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케이와 사귀며 그는 오클랜드 번화가의 스시집 주방에서 일을 했다. 마침 여자 아르바이트생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했다.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한국인 고용주와 일해 본 나로선 더 이상 한국인 사장 밑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었지만 현실은 ‘이번 한 번만’ 하고 타협을 원했다. 비록 고용주가 한국인 부부이기는 했지만 근무 시간도 짧고 남자친구가 일하는 곳이니까 가볍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음식이 나오면 기본적인 세팅을 하는 것이다. 푸드코트 어딘가에 있을 손님을 향해 메뉴를 불러 음식을 내보내야 하는데 생각보다 일이 너무 복잡해서 적응이 안 됐다. ‘시간이 약이려니, 곧 적응이 되겠지.’ 하고 매일 스스로를 달랬다. 반면 상대적으로 근무 시간이 길고 주방에서 할 일이 많았던 케이는 너무 힘들다며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그의 의견을 존중했고, 나까지 그만둘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계속 일을 할 생각이었다. 괜히 커플이 한꺼번에 그만두면 이래서 지인을 쓰면 안 된다는 편견이 생길까 봐 더욱이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남자친구가 그만뒀으니 여자친구인 나도 그만두는 게 맞다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하아... 이거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기분 나쁜 얘기잖아. 그래, 부당 해고다.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는 건 부당한 해고란 말이다! 내가 일이 서툴러서 트레이닝 기간 중에 자른다는 명목도 아니고, 남자친구가 그만두니 콤보세트처럼 묶어 내보내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급여가 들어왔는데 최저임금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이 트레이닝기간 동안은 최저임금 이하로 준다고 구두로 계약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뉴질랜드 법적으로 금지된 사항이었다. 물론 일을 가르치는 동안 최저임금을 맞춰주기 아까울 수도 있지만 트레이닝 기간이든 일이 익숙해진 기간이든 근로자가 고용자에게 갖다 바치는 시간은 똑같다. 이 개념을 이해하고 나니 그냥 먹고 떨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내가 다치더라도 닥치고만은 있지 않았던 나이다. 갑질하는 고용주는 고이 보내드릴 수 없다. 노동법을 어기는 고용주는 뉴질랜드든 어느 나라든 예외는 없다. 너네 잘못 걸렸어!


 뉴질랜드 노동법을 찾아보니 그들은 최저임금을 어긴 것뿐만 아니라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을 시킨 잘못까지 있었다. 메일로 노동청에 상황을 정리해 보냈다. 실제 일한 날짜를 적고, 은행 어플에서 받은 급여를 캡처해서 보냈다. 그러자 조사관이 우리가 일했던 스시집에 직접 찾아가 사장 부부에게 근무표를 요구한 모양이다. 몇 달간 메일을 주고받은 뒤 최저임금을 주지 않은 것을 밝혀내었고 케이와 나는 미지급된 최저임금 차액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일지 몰라도 그들은 이 일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던- 최저임금을 준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리라. 만약 그들이 정신을 못 차렸다면 똥 밟았다 셈 치고 여전히 트레이닝 기간에는 최저임금 이하만 받을 사람, 이에 신고하지 않을 사람을 구하겠지만.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일을 하는 게 목적인 사람들이라면 시급 차액을 받기 위해 영문의 메일을 주고받는 게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간도 많았고 신념이 더 우선인 사람이라 가끔씩 오는 메일에 답장을 하는 것이 딱히 번거롭지는 않았다. 


 스물한 살 때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었다. 어느 한식당에서 크리스마스이브날 트레이닝을 시켜보겠다고 해서 일을 구할 수 있다는 들뜬 맘으로 출근을 했다. 성수 기인 만큼 내가 일을 잘했는지 못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척이나 바쁜 하루였다. 사장은 트레이닝 기간이라며 돈을 한 푼도 안 주고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무일푼으로 가장 바쁜 날 일을 시킨 뒤 연락을 끊은 것이다. 물론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았을 수도 있지만 트레이닝 기간이라는 명목하에 열정페이를, 아니 그조차도 주지 않는 도둑놈 심보로 가게를 운영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외국에서 일하는 한국인 사장들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 

 트레이닝 기간이라 아직 재능까지는 발휘를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빌려 썼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파는 음식과 장소만 돈이 아니다. 시간도 돈이다. 그곳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다른 곳에서 보냈을 시간, 그 기회비용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당연한 시장 논리를 몇몇 고용주들은 너무나 무식하게 모르고 있다. 꼭 노동청에 고발을 당해야만, 벌금을 내야만 노동법이 지켜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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