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수치란
몇 해 전 읽은 베른 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아팠다. 인간의 수치심을 이토록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 있다니, 인간 내면에 옹이를 튼 수치심, 그것이 무엇이든 모른 체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예의가 아나었던가. 나는 그것을 상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고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자리한 수치를 들켜버린 듯 주인공 한나에게 공감했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읽은 <책 읽어주는 남자>는 새로웠다. 조금 더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나에게 몰입해 그녀의 동선을 따라갔다. 수치를 모면하기 위해 사람과 헤어지고, 직장을 잃고, 범하지 않은 죄를 묵인하고 마침내 자살을 선택했다. 과연 그럴 일이냐고,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그만한 가치가 있냐고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말한다면 글쎄 반박할 수 없다.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그럴 수 있다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문맹에서 벗어나 마침내 글을 읽게 된 한나는 전후 나치가 저지른 실상을 담은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새 그 일에 연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앎은 무지로 인해 저지른 실수를 자명하게 하고 가책하게 했으리라. 독자는 감옥 속 한나의 감정을 알 지 못한다. 죽은 그녀의 공간에 놓인 책들을 통해 그녀의 죽음이 수치심만은 아닐 거라고 책을 통한 아픈 각성이 있었을 거라고 유추할 따름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가 남긴 문장
● 나는 부인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 모든 것이 쉬웠고, 모든 것이 가벼웠다. 어쩌면 그 때문에 기억의 보퉁이가 그렇게 조그만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작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기억은 저장된 파일을 다시 불러내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 만약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우리가 다시 질서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 내 안에 엄청난 공허가 느껴졌다. 마치 뭔가 손에 잡힐 만한 모습을 바깥세상이 아닌 내 안에서 찾으려다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한나의 수치심이 법정과 수용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두려워 범죄를 저지른다고?" - 책 읽어주는 남자 169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숨기기 위해서 그녀는 늘 싸우고 또 싸웠다. 실제로는 본격적인 후퇴일 뿐인 전진과 은폐된 패배일 뿐인 승리로 점철된 삶이었다. - 책 읽어주는 남자 171
베르크는 한나가 과거의 여자이기를 원하고 한나에게 베르크는 과거이자 현재였다. 한나의 사랑도 수치심도 몸으로 겪어낸 역사도 모두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