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를 ‘당한’ 적 있으신가요? 저는 웅변이나 논술, 글쓰기와 관련된 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고, 시나리오 공부를 할 때도 첨삭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를 나갔을 때는 수상, 아니면 탈락으로 저의 글쓰기 실력을 가늠해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글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구체적인 점검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거죠.
그런 제가 방송작가가 되었을 때도, 선배들이 저의 글에 대해 지적을 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오프닝 원고에 대한 국장님의 코멘트가 기다려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막 라디오 음악방송 메인 작가가 되었을 때도 저의 글은 퇴고에 있어서 만큼은 원시림(!)에 가까운 글이었습니다. 5분 후, 생방송에서 아나운서가 저의 원고를 읽을 때까지는 말이지요.
시그널 음악이 깔리고, 아나운서가 오프닝 멘트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갑자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시가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나운서가 제가 쓴 원고에서 정말 토씨 하나, ‘한 글자’를 다르게 읽었던 겁니다. 머릿속까지 빨간색으로 들어찬 듯한 기분, 저는 어지러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요? 방송이 끝나고 그녀의 대본을 봤더니 어느 문장의 조사에 빨간색 사인펜으로 ‘ / ’표시를 해두었더라고요.
‘ / ’? 이게 무슨 뜻이지? 내 글이 ‘ / ’라고? 트…틀렸다고?
빨간펜으로 그은 표시는 글자의 크기만큼 작았지만, 이미 눈이 뒤집힌(!) 제 눈에는 마치 시험지를 채점할 때 오답에다 긋는 표시 같았어요. 대체 뭐 때문에 그랬을까? 국장님께 한 번 더 확인도 받았는데? 아나운서에게도 나름의 사회생활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한동안은 기가 막히고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그야말로 넋을 놓고 있었어요.
그래, 그녀에게도 나름의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원고가 너무 깨끗하면 열심히 일 한 티가 안 날 테니까… 써준 대로만 읽는다며 ‘앵무새’라는 비난을 듣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할 테니까…
그렇지만 아주 한참 동안, 그것을 스스로는 용납할 수 없어 괴로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나운서가 긋는 그 ‘ / ’ 표시가 끔찍하게 싫었어요. 그래서 원고를 최종적으로 검토할 때면 아나운서에 빙의한 듯, 스스로 라디오 방송하듯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아나운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읽는 날은 저에게 ‘클린’한 날이었어요.
아무래도 그때의 저는 조금 괴짜 같지 않았나 싶어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는 그런 것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거든요. 다른 작가들은 어땠을지 이제 와서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당시의 저는 작가들끼리의 교류하기를 회피헸던 것 같기도 합니다. 회식자리에서 작가들끼리 싸우는 걸 보고 겁을 먹어서였을까요? 그러고보면 저에게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었나 봅니다. 그들도 인간이고, 당연히 말다툼을 할 수도, 욕을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죠. 괜히 서로 잘났다고 신경전을 벌일 것 같아 겁이 났던 것 같기도 하고요. 막내 작가일 때도, 메인작가가 되어서도 나이가 가장 어렸던 저는 입도 뻥긋 못했겠지만요. (아니, 왜 말을 못 해!)
가끔 그때 깨어졌던 작가에 대한 환상 혹은 고정관념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란 글을 잘 쓰는 것 외에,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글을 잘 쓰는 것 외에, 어떤 작가로 남고 싶을까? 나는 작가 혹은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퇴고 작가’이고 싶을까?
‘열정페이’로 일하던 시대엔 ‘선배’라는 이름으로 다른 작가의 창조성을 짓밟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가’인 직장동료는 꽤 강력한 검열관이자, 경쟁자라는 사실을 사회 초년생 때부터 뼈저리게 느꼈던 거지요.
오죽하면 선배 작가의 이런 경험담이 괴담처럼 작가들 사이에서 퍼졌을까요. “나 때에는 말이야, 선배가 내 원고를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서 던졌어! 나는 울면서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들을 주웠어. 그녀는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써오라며 소리를 질렀지… 지금 너희는(그런 선배가 없으니까) 편한 줄 알아야 해.”
굳이 원고를 지적하지 않아도, 집에서 앞머리를 자른 다음날 선배가 “머리를 어떻게 사선으로 자를 생각을 해?”라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면 듣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축될 수 있습니다. 창조성을 마음껏 드러내야 할 것 같은 작가가 감정노동자가 되어버리죠. 하지만 겨우 작가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내 삶이 모두 주저앉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열정페이’가 뜻하는 또 다른 근무의 형태는 ‘힘들어도 버텨라.’였습니다. 끝까지 버텨서 열정과 능력을 중명해서, ‘그 바닥’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해야 다른 프로그램으로 가는데도 큰 문제가 없을거라 믿었지요.
어쨌거나 상사의 비인격적인 대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내가 그 불행한 장면의 주인공이 될 때마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을 떠올리며 의기소침해지다가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좋은 원고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부족한 원고일지라도 나름의 예를 갖춰 말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후배의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로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꺼내는 우리의 창조성은, 글을 쓰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력 같은 것입니다. 작가는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요. 그래서 작가처럼 창조성을 도마 위에 올리는 사람들은 자기 책상 앞에서만큼은 창조성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나를 응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소리를 차단할 권리, 악의성 댓글을 읽지 않을 권리 같은 거지요.
창조성이 이렇게 나의 생업과 밀접해지니 이제는 그것을 스스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깥세상’에서는 나의 정체성을 알리는 것이 보호색이었지만, ‘작가들의 세상’에서는 또 다른 보호색이 필요했지요.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방송작가가 프리랜서여서 다행인지도 몰랐습니다. ‘내 책상이 있는 곳’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