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말입니다.
상대방이 나의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장소에 있거나, 너무 힘이 셀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초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집 앞 놀이터에서 어떤 덩치 큰 언니에게서 500원을 빼앗겼는데, 다른 언니들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 저에게 모여들었던 겁니다. ‘이 500원, 네가 빼앗긴 그 돈 맞지?’ 하는 질문에 저는 한…참… 대답을 골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오해하지 말라며 끼어든 덩치 큰 언니의 ‘말빨’에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렸죠.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섰던 언니들은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했지만, 결국 가던 길을 그냥 갈 수밖에요.
‘아니, 그 돈이 내 돈이었다고 왜 말을 못 해!’ 저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지영이가 왜 도대체, 왜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도 뻥긋하지 못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언어라는 건 때로는 너무 사소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버거운 것이어서 내 입을 막고 스스로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것 같아요.
누구나 한 번쯤 자다가 이불킥을 해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저도 딱 한 번, 이 사건 때문에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고나니 이불킥을 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분노를 다룰 때 제법 괜찮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으니 소개해 드릴게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하게 되는 그것은,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비슷해요. 현실에서 그런 일은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으니, 우리 머릿속에서만 해보는 겁니다.
레디, 액션…! 과거로 회귀한 저는 이겼을까요? 여전히 말 한마디 하지를 못합니다. 제 대사가 너무 길어서 그런 것 같아요. 대본을 고치고, 다시 리플레이합니다. ‘내가 그때 좀 더 다르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그것보다 좀 더 세련되게!’, ‘아니, 그것보다 좀 더 짧고, 굵게!’, 아니, 보다 악랄하게…!!!’
억울한 일이 생기면, 저는 이렇게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대본을 쓰는 상상을 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이 링 위에 올라 치열하게 자신만의 언어로 대립을 하는 거죠. 그러면 저도 저의 언어를 몇 번이고 고쳐서 가다듬어야 하고, 상대방이 무슨 말과 행동을 할 것인지도 예상해야 합니다. 다듬을 수 있는 것은… 제 말과 행동뿐이니까요.
상상의 나래란 비현실적이고 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여지없이, 무너져내리듯 지독한 상념에 빠져들었지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을 때는 허무함과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문장을 생각해 내면 사르르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이렇게 말해야지…!
‘과거 회귀 대본 쓰기’에서 중요한 점은 웬만해서는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기를 바랐다거나, 그냥 한 대 쥐어박고 도망을 간다거나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를 화나게 한 상대방에게 던질 ‘짧은 한마디’와 ‘논리 정연한 설명’에 매달렸습니다. 방금 관전(!)을 시작한 누구라도 내 말 한마디에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 주었으면 했어요.
어떤 대사는 문장을 짧게, 더 짧고 굵게 깎아내다 보면 누구의 응원도 없이 오롯이 받아내야 했던 고통과 외로움에 대한 외마디 비명에 가까워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문장으로 대치될 수 없는 촌철살인의 한마디가 될 때까지, 자연스럽고 만족할 만한 마무리가 될 때까지,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은 제법 질기도록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놓은 문장이 ‘실제로 내가 내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말’이 될 때까지, 저는 몇 번이고 고치고 또 고치며 내 문장의 논리를 점검했던 거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땐 어쩌다 그렇게 억울하고 분한 일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을 일들이기는 하지만요. 여러분의 어린 시절에도 이불킥을 할만한 일이 한둘쯤은 있으셨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뭐라고 말을 하고 싶으세요? 아니, 좀 더 짧게요. 아… 좀 더 세련된 말은 없을까요? 그렇지, 이번엔 보다 악랄하게~~!!
방금 불을 끈 캄캄한 방 안에서는, 밝은 면만 보다가 어둠 속에 들어오게 되니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되지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빛이 없을 때는 마주하고 있는 것의 명과 암, 둘 중에 무엇이 먼저가 되었건 하나라도 먼저 짐작하거나 더듬어 보아야 그렇지 않은 면도 빠르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사람의 밝은 면만 보려고 하면 갑자기 어두운 상황이 되었을 때 실망이 클 것이고 반대로 어두운 면을 먼저 본다면 밝은 면이 보일 때마다 나를 안도하게 해주겠지요. 철없던 시절 제가 사람에 대해 통찰하는 방식은 이러했습니다. 친구들과의 외출도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것도 제한하셨던 엄격한 부모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상상하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거든요.
‘중2 때까진 늘 첫째 줄에’ 있다가 ‘겨우 160이 됐을 무렵’까지는, 주변의 시선에 참 많이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거기서 한치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만만해 보이기가 싫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유행을 따르든, 친구를 따라 하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호색’을 만드는 것이 저와 제 또래들이 사춘기를 보내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체성의 일부가 되겠죠.
강하게, 아주 강하게,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겁니다. 나 그냥 사는 거 아니라고. 나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근드리지 믈르그.
그러니까 그 시기에는 다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참 중요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키가 이미 큰 편인데도 자기보다 키 큰 사람을 위로 올려다보는 것이 싫다며 늘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고, 어떤 친구는 스타일이 ‘확실한’ 그 친구를 늘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제가 글 잘 쓰는 학생인 것이 좋았고, 그게 저의 보호색이 되도록 애쓰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매년 받는 상장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불안해하기도 했지요.
고등학생이 되자 담임선생님께서 게시판에 붙여주시는 대회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참가하는 횟수도, 성과도 줄어들었는데요. 어떻게 해야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저의 보호색이 옅어지는 것을 힘없이 지켜봐야 했습니다. ‘넌 장래에 작가가 될 것 같다’며 응원해 주던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실망할 것 같아 숨고 싶었어요. 대회에서 떨어진 이유를 몰라 답답해하기보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아요. 아니,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단 말이야?
그런데도, 저는 쓰고 싶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쓰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었어요. 글쓰기는 저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보호색은 옅어졌을지라도, 여전히 글쓰기는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여주고 내 자아를 강하게 해주는 가장 멋진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학교 공부는 뒤로한 채 불쑥 솟았다 사라지는 찰나의 생각들을 단단한 벽돌처럼 만들어 존재의 집을 쌓아 올렸습니다.
고3 수험생으로 지내던 어느 날은, 일기를 쓰다가 문득 그런 상상을 했어요. 다 늙어 등이 굽은 내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낮잠을 청하듯 종이 위에 엎드리고, 그리고 영원한 잠에 빠지는. 그런 죽음이라면 대단한 웰다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물론 그전에 박경리 같은 대문호가 된다면 더욱 완벽한 웰다잉이겠지만요.) 그때부터 저는 글쓰기와 평생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가 되기로 한 거죠.
어떤 이야기든 꺼낼 수 있는 데다 몇 시간이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이자 멘토가 바로 글쓰기였어요. 글쓰기는 대학 시절부터 힘겨운 방송작가 생활을 할 때도 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지요. 마음이 힘든 밤이면 책상에 앉아 글을 썼습니다. 서울 하늘에 홀로 떠 있던 새벽달이 푸른빛을 내며 창가 옆으로 올 때까지, 저는 단숨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고, 고쳐 쓰고, 또 읽기를 반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