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접하는 편지글이나 방송에 소개되는 사연은 실시간 소통이 아닌 까닭에 필연적으로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떠안게 됩니다. 시간은 상처를 잊게 하고 미화하기도 하지만, 색다른 관점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것이지요. 공감을 위한 주문인 '그럴 수도 있지'를 던지기 위해, 어쩌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감에 있어서는, 시간을 두고 되새겨 읽을 수 있는 글이 더욱 유용하겠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문학 속에 존재하는 허구의 인물과 이야기에는 공감을 넘어 감동을 받지만 실존하는 인물이나 주변의 인물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보다 ‘Y/N' 선택지를 펼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도와줄까? / 말까?
답답하고 화가 난다. 뭐라고 한마디 할까? / 말까?
그의 노력이 훌륭하다. 나도 배워야겠지? / 할 수 있을까?
내 세상과는 다른 이야기 같아. / 이런 건 읽어서 뭐 해?
어쩌면, 그것은 앞서 17장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화자의 모순을 참을 수 없거나, 감정이입과 동시에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거나 공감하더라도 나에게 이익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경우는, 내 마음이 오랜 혼란 끝에 지쳐버린 것입니다. 내 마음이 상처 입었을 때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곪은 상태로 혼란스러움을 방치한 결과입니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알지 못한 자신의 고통을 잊은 채 급하게 주변을 더듬어 찾은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그것이 최선의 소통방식, 사고방식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길...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져 합리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이라 믿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의 오류를 발견하고,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선상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시간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는 서로 비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내 마음이 너무 많이 혼란스럽거나 감정적으로 휘둘린다면, 아마도 끝까지 경청하거나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자꾸 타인의 이야기를 입력하기만 하면 나의 에너지가 크게 소진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중심을 잘 잡아야 균형 있는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공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으면서 공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 이런 공감의 스킬을 알면 좋습니다. 공감은 하되,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절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다른 사람 또한 나를 포함한 누군가와 절대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면 됩니다. 나와 나의 부모, 나의 자녀, 나의 친구와 이웃들이 모두가 독립적인 자아임을 인정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돌보고 균형을 잡는 것이 우선입니다. 시간적 여유를 떠안을 수 있는 텍스트를 끝까지 읽고 마찬가지로 나의 이야기도 끝까지 써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타인에게도 공감하고 자신에게도 공감하는 토대를 쌓기 위함입니다. 자기계발이나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어왔다면, 이제는 공감을 위한 연습을 가끔 떠올리며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래야 나에게 공감하고, 비로소 남에게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공감의 바운더리를 넓히는 것이 나도 쓰고, 남도 쓸 수 있는 문화의 첫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