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괴로운 심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답답했던 것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 누군가 지속해서 나에게 공감과 지지를 보낼 때, 우리는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숨통이 트인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말할지 말지 고민했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주게 되면, 우리는 좀 더 다른, 깊은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인정받고, 위로받고, 치유되는 한편, 서로의 영혼이 통했다는 한층 더 고양된 기분을 느끼기도 하지요.
이처럼,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과 표현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공감은 표현을 더욱 넓고 깊게 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글쓰기 등 표현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드러나거나 표현하게 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단지 과거에 억제된 경험 때문에 표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방법이 달라질 뿐이지요. 그러니 누구든 공감과 응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표현과 공감의 선순환이 시작될 것입니다.
공감과 응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 ‘나는 당신에게 공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공감의 주문으로 상대방의 표현을 경청하고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굳이 공감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누군가 ‘공감해 주는 것’을 넘어 내 삶에 공감할 누군가가 세상 어딘가에 더 있을 것이라는 ‘공간감’,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화제가 일반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삶에 대한 희망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에 동화되는 것과는 다른 의미지만, 공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와 희망 혹은 가능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소하고 연약한 실낱같을지라도, 희망을 틔우는 씨앗이 되기에 충분하지요. 사람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자신을 향한 긍정적인 시선이 늘어나고 부정적 반응의 강도가 줄어든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게 되며 생각과 행동의 반경이 넓어집니다. 그것은 어쩌면, 마음이 옭아맨 마음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스스로 고난을 타개할 방법을 찾거나,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주도적으로 모색하게 됩니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위해 최선이 아닌 차선, 혹은 그 이하의 길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삶에 언제 가장 열정적이고 충실해질 수 있는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하고, 인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표현은 공감을 위해 필요하고, 공감은 삶의 희망이 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문학은 옳고 그름을 말하지는 않지만, 개연성 없이는 인물과 작품에 생명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외롭고 처절한 상황에서도 자아가 명확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구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문학은 자아를 돌보며 다듬어가는 인물에게 찬란한 시선을 부여합니다. 반대로,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자아를 궁지로 몰아넣는 인물에게 폐쇄적인 공간감을 그려놓지요.
그러다 보니, 문학을 깊이 읽다 보면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대상이 주인공뿐 아니라 독자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문학은 그렇게 자신에게 묻고 대답해 보기를, 호수에 비친 숲처럼 생생하고도 비유적으로 간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