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앞 장에 이어서 우리가 당신의(가족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는 네 번째 이유는, 실시간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공감할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8572 님, ‘추운 날, 가게 문 열고 손부터 녹이고 있어요. 어제 KBS 리포터분께서 방문하시고 작가님 손편지도 보고 가셨답니다. 오늘도 반가운 소식 기다려지네요.’하고 문자 보내주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작가님 손 편지가 거기에 있어요...? 두 번이나 방송을 타셨(?)네요. 오늘도 행운이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과거 라디오 방송을 했을 때, MC를 했던 아나운서가 이렇게 사연소개를 했답니다. 방송은 매체의 특성상 쌍방향 소통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소개해도 8572님의 대답을 듣기는 어렵답니다. 소통을 목적으로 받은 문자사연들을 짧은 시간 안에 ‘일방적으로’ 해석해 소개를 하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거지요.
당시 MC는 제가 퀴즈 당첨자에게 선물을 손편지와 함께 보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왜냐하면 다들 타이핑, 복사, 프린트를 해서 보냈거든요. 옆자리의 선배도 그냥 복사하지, 뭐 하러 일을 사서 하느냐는 핀잔을 주기도 했어요.) 저도 며칠 후에 리포터로부터 우연히 어느 옷수선가게에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저의 이름이 적힌 손편지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답니다. 손바닥만한 편지에 손글씨를 쓴 편지를 작업실 벽에 붙여 보관하고 계셨다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요.
몸 전체를 움직이는 직업에 비해 손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업들이 있습니다. 타이핑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손님들의 머리를 다듬는 직업은 출근하면 작업을 하기 전에 손을 따뜻하게 녹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손놀림을 부드럽게 할 수가 있거든요. 방송 탄 이야기도 정말 놀랍고 반갑지만, 작가로서는 삶이 녹아 있는 메시지가 우리의 마음도 부드럽게 녹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대중매체는 존재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진행자가 멘트를 할 때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을 열고, 출근 바람을 맞고, 부지런히 몸과 손을 데우면서 일해야 하는 분들에 대한 수고로움과 존경심을 담아 소개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짧은 시간, 그 멘트를 하긴 아나운서에게도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쉽지만 빠르게 다음 문자 사연 소개로 넘어가야 했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덕분에, 일방적인 해석이 오히려 사연 소개에 감칠맛을 더하는 면이 있습니다. 사연이 오더라도 문법이나 내용상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을 경우, ‘이게 그런 뜻인가?’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그럴 수도 있지!’를 떠올리면 찰떡같이 이해한 진행자의 소개가 가능해집니다. 막상 소개했는데 사연의 주인공이 라디오를 듣다가 자리를 비워도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은 직접 뜨개질해 짝사랑을 전하는 목도리처럼 글자 그대로 포근한 낭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목도리를 선물할 사람을 생각하며 뜨기는 하지만, 선물을 하기 전에는 이 목도리의 길이가 그 사람에게 잘 맞을지, 목도리의 색깔이 그 사람이 입고 다니는 옷들과 잘 어울릴지, 연인이 있는지, 오늘도 그곳에서 마주칠지 조차도, 알 수가 없으니까요. 순전히 목도리를 짜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선택하고 추천하는 스타일이 되는 거지요.
주고받는 편지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질문에 상대방은 바로 대답할 수 없고, 나의 문장을 상대방이 조금 다르게 해석하더라도 빠르게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실시간으로 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해석한 후 곱씹는 시간이 필연적으로 다가옵니다. 성급한 해석이나 오해와는 멀어지게 되겠지요. TV드라마나 소설 등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가족간의 갈등이 편지로 마음을 전하면서 화해로 귀결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답신을 쓸 때에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정제되고 완결된 문장으로 옮기게 되니, 감정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을 중심적으로 쓰게 되는 것이지요.
실시간으로 다방향 소통이 24시간 이루어지는 세상, 잠들지 않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소통은 공해, 공감은 의무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디지털 디톡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읽히기를 기다리는 라디오 사연, 일방적인 해석이 담긴 소개,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려야 하는 편지는, 비록 답신이 불가하거나 소통이 느리기는 하지만 강제적으로 떠안는 기다림의 시간은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머무르며 이해와 공감에 깊이를 더해주는 조미료 같지요. 무의식이 나의 이런 감정, 저런 감정을 허락 없이 들추더라도, 이내 대부분은 가라앉게 됩니다. 편지지가 잉크로 물들기 전에 내 마음부터 정리하게 되고 말고요. 그것을 우리는 여유라고 부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