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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당신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

by 이지영

우리는 문학으로부터 공감받고, 문학을 통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문학을 통해 나의 세계를 넓히는 순간 찾아옵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자신을 위로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해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가지며, 나와 세상의 공통된 부분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상에 들어가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느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그들의 터전에 뿌리내리지 않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화자의 상처가 나의 고통이 될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같은 욕망과 좌절을 안고 사는 인간임을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문학을 읽는 것은 주인공의 옆에 가만히 서서 언제나 피터팬과 함께하는 팅커벨처럼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에게 놀랄만한 사건이 생기면 내 일처럼 몰입하고 무사함에 안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정이입’이라고 부르는데, 이 행위를 통해 우리는 몇백 년 전의 사람,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감정선에 무의식을 실어 ‘파도타기’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곁에 있는 부모님이나 자녀, 친구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감이란, 나와 다른 세계, 다른 삶에서 오는 다른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는 만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부감이 생깁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오만과 편견’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정보 중에서, 이미 아는 것을 솎아내고 내가 몰랐던 것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의 어느 부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쌓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식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책을 읽고 그와 관련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진정한 관심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읽고, 지적 호기심을 따라 행간을 파고들고, 인물의 행동과 감정, 배경을 따라 책 전체의 메시지를 알게 되는 것은 상당한 전율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도, 감동도 따라오지를 않지요. 중요한 이야기인데,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인 만큼 특별하게 와닿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지금부터 크게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족과 대화가 단절되는 이유와 조금 비슷할지 모릅니다.


첫째, 화자의 생각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학작품 속에는 주인공이 속한 세계의 도덕적 잣대와 반대되는 욕망이 발견됩니다. 가령, 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웬디는 밤중에 피터팬이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동생들과 자신들 모두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부모님의 허락부터 구해야 하는 것이 자나 깨나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에 대한 도리일 것입니다. 제 몸을 공중에 붕 떠오르게 한 팅커벨의 가루가 아무리 신기해도 그렇지, 영원히 늙지 않는 네버랜드가 있다는 말을 덜컥 믿고 가버리다니…!


그러니 만약 웬디가 제 동생이었다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꾸만 화가 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도, 몇 날 며칠을 잔소리할 것 같아요. 아무리 신기한 걸 보여줘도, 아무리 잘생기고 착해 보여도, 낯선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요. 피터팬은 웬디를 포함한 내 동생들을 유괴한 범죄자로 신고해야 마땅하고요.


둘째, 내 이야기인 듯, 빠져도 너무 깊이 빠져들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 속에서 나무꾼은 선녀의 옷을 감추고 돌려주지 않습니다. 선녀가 자신과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아야만 돌려주겠다고 하지요. 결국 아이 셋을 낳고 기르던 선녀는 어느 날, 잊고 있던 날개옷을 집 안에서 발견하고, 아이 셋을 모두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나무꾼이 만약 나의 아들이라면 어떨까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울며 불며 땅을 치고 통곡하고 있다면, 우리는 잠자코 들어줄 수 있을까요? 제가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라면, 그러게 왜 분수에 맞지도 않는 여인을 강제로 데려다 놓고 살았느냐고, 시간이 약이니 얼른 털고 일어나라며, 정신이 번쩍 들게끔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싶어질 겁니다. 아니, 이미 몇 대 날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야기 밖에 있는 독자일 때와 ‘찐’ 부모일 때의 다른 점은, 그가 나의 가족이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빨리 잊고 안정된 새 삶을 시작하기만을 바랄 겁니다. 반대로 독자의 입장이라면, 하늘로 올라갈 방법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서, 그가 경험하는 신묘한 하늘나라 이야기를 듣고 싶을 것 같아요.


셋째, 서로의 의견(이익)이 충돌하거나 내가 어찌어찌 공감하더라도 당장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옥황상제가 우리 아빠입니다. 자매인 직녀가 견우와 사랑에 빠져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맨날 알콩달콩 놀다가 몇 번 혼이 나더니, 광활한 우주의 은하수 끝과 끝으로 떨어져 지내는 큰 벌을 받아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둘은 아주 펑펑 울기만 해서, 지상에는 물난리가 났지요.


이 경우에는 옥황상제가 지상에 벌어진 홍수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옥황상제의 딸 입장에서도 보면 큰 손해가 아닐 테니 수습하지 않아도 큰 이익은 아닌 것이지요. 그러니 옥황상제가 ‘글쎄, 네 자매인 직녀가 말이다...’로 시작해 아빠의 입장을 자꾸만 이야기한들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도 자매가 있는 저의 경험상(!) ‘너마저 아빠를 속썩이면 안 된다.’는 메시지로만 들릴 거 같아요. 한편, 너무 힘들어할 내 동생, 직녀를 생각하면 도리어 아빠를 원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직녀와 견우에게 내린 벌이 잘못에 비해 너무 크다고 생각하니까요.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하니 부모입장에서는 화날 만도 하겠지만, 아빠, 요즘 육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요...! 제발 오은영, 최민준 나오는 유튜브 몇 개만이라도 보세요...! 아빠의 말을 듣지 않은 직녀와 견우도 괘씸하지만, 놀기만 했던 것이 문제였다면 할 일을 다했는지 검사한 후에 외출을 허락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전 아빠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요. 진짜 문제는 자녀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대처한 아빠, 옥황상제님에게 있는 거 같은데요? 오작교 만드느라 애꿏은 까치와 까마귀만 탈모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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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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