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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본능, 나만의 언어, 그리고 문학

by 이지영

지금까지 우리는 ‘퇴고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저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끝에는 내 존재의 명확함이라는 소기의 목표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또, 우리 즐거움의 원천에 공감과 지적호기심이라는 물수제비가 있음을 발견했지요. 글을 어떤 기준에 의해 사다리 위에 놓기를 거부했고, 모든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내 주변 이웃과 가족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러나 그들 중에서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 것이고, 책을 쓰는 이는 더욱 희귀할 것입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가 자주 나에게 들려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잔소리거나 혹은 스스로 표현의 본능을 이기지 못해 기꺼이 따르는 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능이라고 하면 식욕이나 생존욕구처럼 ‘욕’이 붙는 단어를 떠올리곤 하지만, 생각보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거나, 자려고 누웠는데 불을 끄러 가기 귀찮은 것도 내 몸이 편해지는 것을 선호하는 본능 때문입니다. 궁금한 것을 참기 힘들다거나, 내가 남과 다르더라도 누군가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은 본능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도, 들키게 되는 것도 우리의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과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말과 글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과 글이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 드러납니다. 직업, 취미, 종교, 사상, 취향,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과 감정들이 어떤 것으로 승화되었을지 모르나, 정화된 것은 아닙니다. 정화되지 않음으로써 나를 스쳐간 사건들과 나를 만드는 생각들은 정제되지 않은 나열에 그치게 됩니다.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나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답지 않으면,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게 되고, 숨 막히는 기분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 숨죽이고 남이 정한 기준에 맞춰 살던 사람들은 마음에 병에 대처하려고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병명을 갖춘 어떤 ‘병’이 걸려야 돌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마음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겠지만요.




내가 남과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몰랐다 해도, 잊었다 해도, 수많은 담금질 속에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은 찍힌 자국이 났을 테고, 어떤 부분은 무뎌지고 어떤 부분은 날이 섰을 것입니다.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이 그러한지 들여다보면 용기 내어 글로 표현하면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고 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만의 세계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만의 언어'는 이런 과정에서 하나둘씩 생겨납니다.



내 마음이 오랜시간 담금질 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이 ‘나만의 언어’를 담금질 해 볼 차례입니다. 나만의 언어란,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맞서는 구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단어나 지식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고, 나의 초심과 사명에 스며있는 정신이기도 합니다. 나의 역사와 얼, 나의 정신세계가 깃든 모든 말과 글이 나만의 언어입니다. 가끔은 문학에서 읽었던 글귀를 인용하거나, 변형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대변하고, 누군가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말이지요.



문학은 얼핏 어려워 보이지만,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마음에 오래 머물렀던 문학을 떠올려 봅시다. 어릴 때 읽었던 동화를 예로 들어볼까요?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든지, 피터팬이 있는 네버랜드에 가보고 싶다든지,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헤르미온느의 모래시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우리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과 조금 다른 생각을 했을지라도, 어쩐지 그때만큼은 공감을 해주는 이가 늘어날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볼품없고 밉게 느껴지더라도 내 생각과 언어는 계속해서 다듬어 나가야 합니다. 나의 역사가 초라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상업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줄거리의 극적인 면을 즐기고 깊이 공감할 여유를 주저해왔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권선징악적인 면이 발견되기는 하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상상과 가치관을 통해 만들어진 문학은 주인공의 감정선에 빠져들게 하며, 공감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살면서 누구나 느끼는 희로애락애오욕을 주인공을 통해 경험하며 내가 마주하는 삶의 모습이 동양과 서양, 고전의 그것과 현대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작품에 깊이 공감하는 동시에 문학이 내게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문학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는 것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채우는 이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어쩌면 독서모임의 본질도 여기에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작가, 주인공, 혹은 그 밖의 등장인물들에 공감하듯, 이 세상 어딘가에, 이 작품을 읽은 누구든 내게 공감해 줄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러니 나는 남과 조금 다르지만, 가끔 볼품없어 보이지만, 이대로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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