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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Jul 03. 2024

자기 주도 기생수의 탄생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 sekatsky, 출처 Unsplash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의미에서 큰 위로와 치유력을 가지는 최고의 변명이다. '그럴 수'는 항상 처절하게 외로운 존재다. 응당 왔어야 할 자리에 '그랬어야'는 안 오고, 크나큰 관용을 베풀거나 혹은 융통성이 없다며 꾸짖어야만 '그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최선의 상황에서는 차선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아쉬운 최선책이 되는, 마지못해 판에 끼워주는 꼽사리 같은 '그럴 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럴 수'는 미련과 열망으로 가득한 '그랬어야'를 기생수로 만들 작정이라는 걸. 내 삶의 장기판에서 나는 '그럴 수'를 참 많이도 두었다. 


  '그럴 수'가 항상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럴 수'가 내 삶의 장기판에 놓일수록 나는 점점 더 나의 세계 밖의 것들을 알게 되었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 덕에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을 하면서 나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을 친구 혹은 동료로 둘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기도 했고, 자기 주도적인 몸부림이기도 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늪으로만 빠지는 것 같을 때, 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10개 버전으로 새로 썼다. 그리고 죽어도 하기 싫었던 일을 하며 버텨봤다. 지금도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것 같지만, 묘한 안정감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모은 돈도 없이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장될 수 있었던 집과 식사. 서울에서 빠듯하게 살던 내가 월세와 식비를 건질 수 있다니. 그때부터는 매달 저축도 가능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잘 사는' 것도 중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답게 일하기는 어려웠다. 비합리적인 권위를 휘두르는 오너 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퇴근하고 난 후에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상사나 동료를 흉보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거기에 낄 수 없었다. 나답게 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지 않았는데, 누굴 흉볼 자격이나 있을까. 그저 나는 이 조직에서 꼭 필요하면서도 튀지 않는, 알맞은 형태가 되기 위해 몹시 고민 중인 사회 초년생 같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조금만 더 버텨야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야지. 있을 수 있는 만큼만. 그리고 다시 나의 길을 가야지. 나는 떨어져 나가는 모습도 '알맞게' 보였으면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방송작가의 세계로 돌아왔다. 아주 운이 좋게도 그 후 내가 일하는 모든 환경이 최고였다. 일하는 공간도, 시간도, 동료도. 맡은 프로그램도, 청취자들도. 나는 20대에 늪인지 똥밭인지 모를 곳에서 구르느라 별로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국장님은 나를 잡초 같다며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그러니까, 결국 내가 작가로 살긴 살아왔으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 테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른인 내가 되기까지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온 듯하다. 나는 엄마가 알려준 '변호사'가 나의 꿈이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으니까. 공부보다는 글쓰기, 말하기,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대신 엄마가 말해준 나의 '따지기 좋아하는 성향'대로, 나는 살아왔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무언의 고집을 부리고 끊임없이 '나 잘하지?'라는 걸 증명해 왔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나를 이 길로 가게 해달라고. 종이 한 장 짜리 상장 외에는 별 소득도 없는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나를 지켜봐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마음이 흔들리고 슬픈 날에는 나의 방황을 따져 물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는 꿈쩍도 않고 취조에 응했다. 동이 터오는 새벽녘이 되면 온몸이 희열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내가 반가웠고 결국 스러지지 않은 내가 기뻤다. 


  어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궁금해하고, 애써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따져 물었다. 나는 깨알 같은 그 무엇도 언어로 소통하기를 원했다. 그렇지 못한 것을 궁금해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먼저 소통하기를 원하는 것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까닭이 더 클 것이다. 20대에는 내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다 보니 더 많이 듣지 못한 것이 죄스러워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표현하지 않는다. '잘 표현하지 않음'조차,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30대의 끝자락에서까지 생각했다. 


  사실은. 사실은, 정말 따져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는데. 에세이 신인상을 받았던 날 나는 가족에게 바로 알릴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며칠을 보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조금만 더 나를 지켜봐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왜 예전처럼 내가 상을 받아오면 통닭을 사주지 않느냐'라며 농담을 한 번쯤 던질 뿐이었다. 나는 그때 26살이었고, 연애 중이었다. 똥밭을 구르는 중이었고, 지금의 남자친구와 결혼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의 저녁식사를 더 이상 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얀 한 장 짜리 종이는 말없이 내게 돌아왔기 때문에. 말을 더 꺼내려다 내 방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보여드리려 했던 하얀 종이들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의 등이 납덩이처럼 두터워지며 터질 것 같기도 하고 짜르르한 소름이 등줄기를 따라 나를 찔러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종이들은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나의 비애를 찾고 말았다. 그러나 울 수도,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공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소리 내지도 울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를 두었지만 나의 성향대로 나는 살아왔다. 또다시 자기 주도적인 '그럴 수'를 두는 날이 올 것이다. 꿈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보다 나의 성향이 입막음당했을 때 나는 더 불행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 순간 사람이 자기 성향대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조금이라도 더 내 꿈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나의 꿈은, 그러니까 실현하기를 미뤄둔 자아는 아주 잠시만 몸속에 묻어둔 거라서. 언제 닥칠지 모를 나의 불안과 우울, 총체적 불행을 이기지 못해 현재의 자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한 기생수 같은 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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