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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의의 울트라맨 출동!

남편은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집 TV 채널은 영화 아니면 뉴스 채널로 항상 고정상태. 오늘 아침에도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월드 클래식 MOVIE' 채널을 틀었다.


"오, '신 울트라맨'이다! 저거 우리나라에서 개봉 안 했던 것 같은데. 좋았어!"


남편은 영화만큼 '울트라맨'도 좋아한다. 울트라맨 버전을 출시 순서대로 줄줄 외우는 수준. 내 눈엔 다 똑같이 생긴 애들인데. 예전에 일본여행 갔을 때 기념품가게에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울트라맨 가면을 사줬더니 정말 애처럼 좋아했다. 사진 찍으려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이 이렇게 손수 가면을 쓰고 포즈까지 취해줄 정도면 말 다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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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자세로 앉아 영화를 보던 남편이 갸우뚱한다. 아무리 봐도 울트라맨이 안 나온다는 거다.


"좀 기다려봐. 원래 주인공은 나중에 나오잖아."


한소리하고 나서 TV 화면을 흘끔 봤더니, 정말 도저히 울트라맨이 나올 분위기가 아니다. 배 위에서 서양인들이 계속 우왕좌왕하고 있는 장면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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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방송사고다. 자막이 잘못 들어가 있네. 편성표에는 '더 버닝 씨'라고 되어 있는데."


의아하게 여기던 남편이 기어이 방송 편성표를 검색해 본 모양이다. 잔뜩 신이 났던 만큼 실망이 컸는지 점점 분노 눈금을 올리던 남편이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항의전화 해야겠어!"


농담이겠거니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데, 진짜 통화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대놓고 화를 내면 어쩌나 귀를 쫑긋하고 있는데 금방 전화를 끊는 남편.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상대편이 심드렁하게 '자막을 바꾸겠다'라고 하고 끊었단다.


"미안한다고 안 해? 아님 제보해줘서 고맙다거나."

"아니, 전혀. 너무 피곤한 목소리라 되려 내가 미안해지더라. 여유로운 백수가 너그럽게 이해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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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분 후. 자막이 사라졌고,

또 몇 분이 흐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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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자막이 짠! 하고 나타났다.


"오! 당신이 큰일 했네. 당신의 히어로 울트라맨이 기뻐하겠는데?"

"뭘 이런 걸 가지고."

"난 당신이 전화해서 막 화낼까봐 쫄아있었거든. 잘 참았네?"

"울트라맨 에이스가 그랬어. '상냥한 마음을 잃지 말아줘. 약한 사람을 생각하고, 서로 도와주자. 설령 그 마음이 몇 백번이나 배반당한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라고. 나는 그저 실행했을 뿐이야. 으하하하!"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편은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소년이다. 흑백 TV로 '공룡수색대'와 '아이젠버그'를 보던 소년이 친척들 만나러 일본에 가서 총 천연 컬러로 만난 첫 히어로가 울트라맨. 그 강렬한 첫사랑이 4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타인에게 상냥하길, 약한 사람들을 생각해주길 바란다는 첫사랑의 부탁... 잊지 말아야지, 그럼 그럼. 평소에도 잘 지키고 있어, 당신. 내가 당신 자상함에 반한 거잖아.


남들은 출근해서 분주한 시간에 느긋하게 영화 보는 백수생활이 나쁘지 않다. 당분간 이렇게 달게 보내면서 재충전해보자, 여보.


그나저나 월드 클래식 MOVIE 채널 담당자님, 우리 남편 설레게 한 '신 울트라맨'은 언제 방영하나요? 제보 감사의 의미로 틀어주심 안 될까요?


"여보, 당신의 영원한 히어로라고 해도 난 여전히 울트라맨 구분을 못하겠어. 그냥 그때그때 옷만 바꿔 입고 나오는 거 아냐?"


"울트라맨은 모두 달라! 일본에서 처음 시작한 1966년부터 내가 국민학생일 때도, 2000년대 한국 TV서 해줬던 애들도! 지금 일본 TV에서 상영 중인 울트라맨이나 몇 년 전 극장판으로 나왔다는 '신 울트라맨'도 마찬가지. 모두 외계 괴수로부터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는 것만 같을 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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