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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괜찮아, 넌 야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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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언저리에 나는 내가 나인 게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 괜찮다고 세 번만 말해줘."라고 구걸하듯 징징댔다. 문자 메시지로, 전화 속 음성으로 누군가 들려주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를 약 삼키듯 보고 들어야 겨우 목울음이 잦아들던 그 시절,


"넌 야물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라고 누군가 툭 던졌다. 시간강사로 강의하시던 선생님이셨다.


그 단호한 말에 피식 웃었다. 늘 뒷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청강생, 강의 후 회식자리에서 분위기 띄우겠다며 평소엔 꺼내지도 않던 시답잖은 농담으로 낄낄대며 까부는 내 모습만 본 당신이 뭘 안다고.


근데 참 웃기지. 무심한 듯한 그 말이 오랜 시간 동안 넘어질 때마다 싸매주고 가만히 등을 쓸어주더라. 어느 순간부턴 꼭 증명해 보이고 싶은 목표 같은 게 되기도 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특히나 인생 후반기 멋지게 보내보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는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 꺼내보고 되뇌는 주문 같은 게 되어버렸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인생이 굴러가기도 한다.


며칠 전 선생님이 정말 오랜만에 새 책을 내셨다. 기쁜 맘에 얼른 사서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 시절의 불안한 나와

그런 나를 다독여준 선생님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선생님, 부끄럽고 서글프지만 마흔을 넘긴 지금도 저는 여전히 무르고 가볍습니다. 볕에 잠깐만 내놔도 야물기 전에 말라 바수어질 만큼 요. 그래도 언젠가 이도 안 들어가게 단단해지는 날이 오면 좋은 술 한 병 사들고 가서, 살아보니 나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고, 일찍 알려주셔서 진짜 고마웠다고 인사드릴게요. 그날이 조금만 일찍 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여보, 나 이렇게 삐딱하던 20대 시절이 있었어. 지금은 정말 인간 된 거야. 당신도 인생에 좋은 말씀해주신 선생님이 계시겠지? 나중에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나야 뭐 알다시피 어머니랑 박 선배가 있었지. 어머니 묘는 매달 가니까 박 선배 보러 한번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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