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우리 수영장 이용 다음 달에 안 된대. 9월이나 돼야 갈 수 있겠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수영장은 저렴한 이용 요금으로 인기가 높다. 특히 여름에는 선착순으로 받는 이용 신청이 금방 마감되어버리곤 하는데, 신청 기간을 놓친 우리 부부는 대기를 걸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 8월이 낼모레인데 연락이 없길래 남편이 전화를 해본 모양인데, 순서가 안 돌아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나보다. 남편의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었다. 어쩌지 이걸.
요 며칠 남편은 혹독한 '거절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 살면서 자주 겪어보지 않았을 낯설고 매운 시간일 게다. 사실 남편은 백수가 되면서도 다 계획이 있었다. 그동안 전문 분야에서 일한 경험을 담은 책을 내고 싶어했고, 눈여겨 보고 있던 새 일자리에도 공격적으로 도전했다. 여기에, 대학의 시간강사 제안이 들어와 수락한 상태였다.
모두 주변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책 출간은 남편의 선배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편은 어떤 책을 쓸 건지 기획안을 꼼꼼하게 작성했고,(내 남편은 긴 직장 짬바를 토대로 육성된 자타공인 페이퍼 작성의 귀재다.) 몇몇 챕터의 글을 작성해 출판사에 보냈다.
주변 추천이 중요한 새 일자리는 많은 이들이 나서서 도움을 줬다. 시간강사 자리 역시 지인의 추천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요구하는 대로 이력서 등 관련 서류를 꼼꼼히 챙겨 제출했다. '그래, 그동안 신나게 열정을 다해 일했던 게 차곡차곡 쌓여 경력과 실력이 되고, 근사한 일들을 만들어주는구나' 하고 남편은 내심 뿌듯해 했다. 제 발로 일터의 울타리를 넘어 뛰어든 컴컴하고 막막한 무소속의 자유 속에서 반가운 불빛들을 만난 기분이었을까.
그런데, 요 며칠사이 모든 것에서 거절당했다. 출판도, 새 일자리도, 강의도 모두 정말 짜고 친듯 각각의 이유들로 무산됐다. 억울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옆에서 보는 나도 이런데 당사자인 남편은 오죽했을까.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적절한 답을 못찾아서 요며칠 나 역시도 허둥지둥하며 보낸 참이었다.
속 시끄럽다보니 잠도 안 오고 해서 남편 잠든 틈에 TV를 켰다. 그동안 못 본 일본드라마를 몰아보는데 대사 하나가 가슴에 콕 박혔다.
"삶에 능숙하지 못한 게 살아간다는 걸 거야."
직장상사이자 인생선배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였는데, 40대 중반인 나에게도, 거절의 낯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편에게도 필요한 위로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 매일이 능숙하고 익숙하다면 그건 제자리걸음의 연속일 뿐이겠지.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거니까, 온 힘으로 하루하루를 밀고 나가야 하는 거니까 거절 따위 쿨하게 제껴버리고 계속 가보자.
내일은 남편 어깨 좀 주물러주면서 폼 잡고 멘트 좀 날려봐야겠다.
"여보, 요 며칠 많이 속상했지? 그동안 거절이라곤, 실패라곤 별로 경험해본 적 없는 당신에게 참 낯선 시간일 거야. 그래도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매일을 뚝딱거리면서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 이게 지금 우리가 지나야 할 삶의 한 코스라고 생각하자. 아마 올 여름은 우리 기억에 엄청 덥고 엄청 의미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되겠지? 이 시간을 떠올릴 때쯤이면 우린 알게 될 거잖아,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괜찮아. 기대했던 자리도 기다리던 공고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급해지지 않는 건 참 어려운 일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