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 만나러 서울 간 남편. 분명 8시 38분 열차를 타고 내려온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다. 늘 귀가할 때 미리 연락을 하는 사람인데 열차 시간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 불안하다.
8시 36분, 전화가 왔다. 살짝 업된 목소리로 늘어놓는 설명을 요약한 즉슨, '식당 시계가 시간을 잘못 알려줘서 기차역으로 출발할 시간을 놓쳤다'는 것. 그래서 '식당으로 다시 들어왔다'는 것.
남편은 친절하게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왔다. 보낸 시간은 8시 40분,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20시 39분. 이때부터 콧방귀가 연속발사되기 시작했다. 아니, 기차 탈 사람이 바늘시계를 보고 움직인다고? 손에서 안 내려놓는 스마트폰은 어쩌고? 그냥 술 좀 더 마시다 갈게 하면 될 것을. 나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닌 거 알면서.
결국 남편은 10시 기차를 타겠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자들. 평소 남편의 주사 패턴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남편 주사의 특징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1. 안 취한 척 애쓰나 오타 작렬
첫 문자는 오타 수정에 성공했으나, 마지막 문자는 그마저도 오타다. 녁, 녀는 '녜' 겠지.
2. 초 단문
단문 수준을 넘어 단어 하나씩 보내는 수준.
3. 노래 가사 뺨치는 사랑고백
진짜 그동안 보낸 문자 합치면 러브송 메들리 만들 수 있을 정도.
남편은 술 취하면 감정의 요동이 격해지는 편이라 속엣것을 드러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진짜 속마음을 짐작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제는 문자들 중에 '그만둘래'가 눈에 들어왔다. 뭘 그만둔다는 걸까. 문맥상으론 사랑하는 걸 관둔다는 것 같지만 뒷문장과 연결이 안 된다. 회사는 이미 그만뒀는데, 그럼 뭘.
밤새 궁금했던 게 아침에 보내온 문자로 풀렸다.
구직이었구나.
사실 남편이 옮겨가고 싶어하는 자리가 몇 개 있었는데, 채용완료 소식들이 연달아 들리면서 많이 낙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해맑게 잘 지낸다 했더니 속 시끄러운 날들이었구나.
일단 놀자고 했지만, 남편은 일하는 걸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즐겁게 일한다. 하고 싶은 게 명확하고, 성취감도 크다.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자부심도 크고 그래서 꽤 인정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즐거움과 만족감으로 30년 가까운 시간을 그닥 쉬는 기간도 없이 살아왔으니 지금 이 '무소속'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게 분명 쉽지 않을 터. 거기다 와이프까지 집에서 쉬고 있으니 24시간 종일 같이 있으면서 스트레스가 배가되는 건 아닐까. 어제의 미움은 좀 누그러들고 짠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종일 침대에 늘어붙어 자고 있는 저 등짝도 가만히 쓸어주고 싶을 만큼.
"남편아, 퇴사 당시를 떠올려봐. 퇴사의 목적이 이직은 아니었잖아. 늘 얘기하듯이,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 만약 그게 바로 할 수 없는 거라면 조금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직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됐지만, 쉼표 하나 정도는 찍어줘도 될 타이밍이야. 마음 단디 먹어라, 남편!"
"주위 사람도 당신도 얘기해주듯 난 어디든 쓰임새가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 다만, 하고 싶은 일을 가고 싶은 자리에서 할 수 있길 바라는 건데. 그저 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한 번 두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