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무라카미 류 그리고 Leon Bridges
내 고향은 군산이다. 과거 한반도의 식량 창고이자 물류의 중심이였던 군산(群山)이다. 황금빛 황해를 바라보며 금강과 만경강 하구에 자리를 잡은 옥구평야를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하며 국내에서 가장 많이 쌀과 보리를 생산하는 한반도의 식량 창고였던 곳이다. 화폐가 없던 시절 쌀이 화폐 대용 물물교역 수단이던 조선시기부터 쌀과 면포가 세금으로 걷어지며 호남평야의 쌀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가 지어질 정도로 유명했다. 군산은 호남평야의 쌀이 모이는 곳, 즉 돈이 모이는 곳, 경제의 중심지였다. 이런 연유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국내 각지의 각종 물자와 쌀을 수탈하기 위해 군산항을 개항시킨다. 1900년에는 군산과 오사카를 잇는 직항로를 개설해 일본 본토와 직교역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수탈을 위해 대전에서 목포로 가는 260킬로미터의 철도를 건설하고, 이어서 익산과 군산으로 이어지는 25킬로미터의 철도를 완공시켜 호서, 호남, 영남의 미곡과 수탈품을 군산항에 집결시켜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점기 동안 부족한 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조선의 토지를 강제 몰수한 후, 그 땅에서 수확한 쌀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일본 본토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쌀의 이송을 위한 항구가 필요했고, 위치적으로 가장 적합한 군산이 치욕적인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작고 조용한 어촌이었던 군산이 쌀 유통과 운송의 중심지가 되며 경성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인구밀도를 지닌 도시로 급성장한다. 큰돈이 오고 가는 곳에 헛된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동안 군산은 빛나는 삶의 기회를 한번 잡아보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댔다. 채만식 선생의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정주사처럼 말이다. 밤이면 강 건너 화려하게 빛나던 불빛에 이끌렸는지, 우연히 먹어본 이즈모야의 달콤한 단팥빵 맛에 매료되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가족도 일제 강점기의 그들과 비슷했다. 충청도 촌구석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군산 외할머니댁으로 이사오게 되었던 것이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하시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호남평야의 한가운데 하늘과 논만이 보이는 곳에서 살던 내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오락거리라고는 AFKN과 일본 소설들 뿐이었다. 집 팔고 땅 팔아 군산으로 이주해 투기꾼이 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던 정주사와 달리 우리 가족은 열심히 살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랬다. 밤낮으로 일하시느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군산 시내와도 한참 떨어진 호남평야의 한가운데 하늘과 논만 보이던 외진 곳의 우리 집을 불평할 수 없었다. 밤에 플래시를 들고나가야 겨우 찾을 수 있던 소작농 아저씨들과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던 화장실이 딸린 집을 불평할 수도 없었다. 아들 두 놈 공부시켜 성공시켜 보겠다고 10원짜리 한 장 허투루 쓰지 않으시던 어머니와 아버지. 드라마나 책이었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엄청난 성공을 하고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게 정상적인 스토리이겠지만, 잦은 이사와 불현듯 찾아온 꼴사나운 사춘기 시기의 어린 중학생 꼬마는 부모의 고마움을 몰랐다. 일본에게 가진 모든 것들을 내어주고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군산의 모습과 자식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는 조금씩 늙어가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자주 오버랩 되었다.
시골에서는 시간이 많다. 낮도 길고, 밤도 아주 길다. 주변에 동년배 친구들이라는 한 명도 없고 두 살 어린 남동생과 나뿐이었는데, 밖으로 나돌아 다니길 좋아하는 동생과 달리 집에 있기 좋아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TV 보는 것과 책 읽기 뿐이었다. 눈치는 있었는지, TV만 보며 노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던 꾀 많던 어린 나는 부모님들이 집에 돌아오시면 소설책들을 읽으며 공부하는 시늉을 했었다. 특히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일본 작가의 글들을 많이 읽었다. 역사적으로 좋던, 나쁘건 슬램덩크 같은 만화를 보며 자라왔고, x-japan의 노래를 즐겨 들었으며, 무라카미 류 같은 일본 작가들의 책들을 보며 중등, 고등 6년의 시간을 보내왔다. 특히나 군산은 일본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었다. 실제 외할머니도 일본어를 곧잘 사용하셨으며, 히로쓰 가옥을 비롯해 동국사 같은 지금까지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들을 제외하더라도 일본의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기록을 보면 군산쌀은 대단히 맛이 좋아 인기 좋은 쌀이라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1990년대 한국에서는 반대로 일본의 고시히까리, 아키바라 쌀 맛이 좋다고 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듯, 실제 군산은 일본의 찬탈의 슬픈 역사를 가진 곳이지만 일본의 개항 이후 많은 신문물들과 사람, 그리고 물자들이 한 데 모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근근이 버텨가는 노쇄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도시의 끝자락에서 난 일본을 동경하고 부러워했으며, 미국의 문화에 천천히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꼴사나운 사춘기의 절반 이상이 그들에게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류라는 작가가 있다.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미국 함대의 주요 기항지였던 곳의 영향으로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것들이 그대로 작품에 드러난다. 당시 히피 문화가 불어닥치던 고등학교 시절, 록밴드를 결성하여 드럼을 연주하고, 8밀리 단편 영화를 만드는 등 범상치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낸다. 얼마나 내가 그에게 빠져있었냐면, 그를 따라 록밴드에서 보컬을 하기고 했고, 춤 동아리를 만들어 춤을 추기도 했으며, 방송반에 들어가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 사춘기 소년인 나에게 그의 글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멋져 보였고, 그를 따라 하는 것이 멋진 거라 생각했는지 닥치는 대로 그의 모든 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기도 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멋진 것이라는 이상한 관념에 사로잡혀 6년을 보냈다. 미군부대와 밀접해 개항의 영향을 받은 나가사키와 미군부대와 일제강점기이기는 하나 개항의 영향을 받은 쇄락해 가는 도시 군산. 그리고 그곳에서 발버둥 치는 청춘의 이야기를 그린 ‘69:식스티나인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얼핏 ‘변태’를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드골 정권이 시위로 물러나고 비틀스의 노래가 어디서든 울려 퍼지던 시절, “(작품 속의) 내가 고교 3학년이었던” 1969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항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은 나가사키 출신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읽으며 난 무라카미 류와 주인공 야자키를 나와 동일시하려 했다. 학교 옥상 바리케이드를 봉쇄하여 페스티벌을 여학생 카즈코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기획했듯, 실제 나는 학교를 봉쇄하지는 않았지만 nirvana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 실황을 가지고 게릴라 ROCK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상상력이 권력을 챙취한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건물에 늘어뜨렸던 야자키와 비슷하게 '권력은 상상력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플래카드를 락카로 직접 써서 나무에 걸었던 기억이 난다. 막연한 일탈과 로맨스를 꿈꾸던 소년은 지금 여의도에 한적한 사무실에 앉아 아무도 읽어주지도 않을 글을 주저리주저리 써 내려가고 있다.
특별하길 원했던 군산의 소년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나가사키의 소년은 라디오진행자, 토크쇼 진행자, 영화감독, 세계 미식가 협회 회원, 사진작가, 소설가, 등 문화 전방위에서 활약하고 있다. 휴거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린다는 『바이러스 전쟁』, 미국ㆍ소련ㆍ중국ㆍ영국에 의해 4개로 분할되어 지배되는 가상의 일본을 그린 『오 분 후의 세계』, 코인로커에 버려진 아이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타락한 세상을 파괴한다는 『코인로커 베이비즈』, 『반도에서 나가라』,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교코』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현재도 왕성히 활동 중이다. 나에게 무라카미 류는 여전히 닮고 싶은 사람이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 무라카미 류를 닮고 싶어 했던 소년은 어딜 가고, 삶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항복하고 만 배 나온 중년의 내 모습이 쓸쓸하기만 하다. 당시 군산보다 현재의 군산은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고. 당시의 나보다 지금의 나 또한 의욕 자체를 상실해 버린지 오래다. 그런 나를 알기라도 하듯 무라마키 류는 30대가 된 나에게 또 글을 보내왔었다.
"우리의 마음 또는 정신은 매우 여려서 상처 입기 쉬우므로 어떻게 해서든 지켜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부분이 마치 화석처럼 말라버려 감정, 감동, 놀라움, 생각하는 힘 등 이 모든 것들을 잃게 된다."
여리고 소중한 인간의 내면을 지키는 방법으로 키워드 '실드'(방패)를 제시한다. 강하게 보이려 애쓰지만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여린 마음을 지닌 나를 향한 응원가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무라카미 류가 52년생이고 내가 81년생이니 3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지금은 많이 비슷해졌지만, 3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과 대한민국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는 3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느낀다. 일본에서의 인기 있었던 것들이 10년에서 15년의 시간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던 경험이 있다. 서핑이 그랬고, 캠핑이 그랬고, 위스키가 그랬다. 집값도 그렇고 출산율도 그렇고, 인플레이션도 그랬다.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는 있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두 나라의 사이에서 우리는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껄끄럽지만 가까운 관계를 여전히 유지 중이다. 물론 한일전을 하면 난 프리미러 리그만 보던 글로벌 축구팬에서 붉은 악마로 울트라 니뽄과 자웅을 겨루는 사람이 되어버리곤 한다. 독도가 자국 땅임을 외치는 정치인들에게 막힘없이 욕설로 대꾸하고, 위안부 사건을 부정할 때면 마음속 분노가 차올라 답답해하곤 한다. 반면, 오다 카즈마사의 미소년적인 목소리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에 감동하고, 무라카미 류와 하루키의 글들에 감탄에 감탄을 서슴지 않으며, 렉서스 자동차와 히비키 위스키에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한다. 일본은 나에게 무라카미 류 같은 존재이다. 천부적 재능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나, 내 재능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랑이 부러움으로, 부러움이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자화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군산 짬뽕거리의 빈혜원에서 먹는 짬뽕과 나가사키의 츄카 다이하치의 나가사키 짬뽕을 두고 무엇이 더 맛있느냐를 겨루는 문제다. 맛의 차이는 분명할 것이고 주관적 판단에 의해 무엇이 더 맛있는지를 선택 할 수 있는 문제이지 누가 더 우월하냐 월등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필자가 느끼는 주관적인 맛은 나가사키 짬뽕의 승리이고, 완성도 또한 월등하다고 생각한다. 닮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거리감을 좁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타고난 능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이미 너무 많이 벌어져 버린 간격을 줄이기엔 너무 낳은 시간이 흘렀다. 이는 타고난 나의 능력에 대한 아쉬움이자, 그동안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던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군산으로 대표되는 쇠퇴의 시간 속 아쉬움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하나 둘 빈집들이 늘어가며 황량해져 가는 구 시가지의 모습에서, 머리숱이 하나씩 줄어가는 내 앞머리가 보인다. 여행객들이 길게 늘어선 중국집과 빵집의 줄을 보며 흘러간 시간의 증거로 서 있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안타까우면서도 아련한 군산의 모습을 보며 나도 군산도 조용해진다.
군산에는 후배가 운영하는 '무제'라는 작은 위스키 바가 있다. 30년 산 위스키 한잔을 마시며 친구들과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니 Leon Bridges의 노래들이 위스키 바를 아련하게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