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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Nov 18. 2022

귓속말을 엿듣다

황규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를 읽고


  통기타 선율과 커피 그라인더 소음을 배경음 삼아, 다소 비장하게 시집을 펼친다. 시끌시끌한 카페에서 시집 읽기란 얼마간 허세가 필요한 일. 잡다하게 뒤엉킨 소리들이 시의 행간을 더 벌려 놓는다. 시선은 분명 시집에 꽂혀 있는데, 어느덧 옆 자리 대화를 흘려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번 시집, 뭔가 다르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귓가를 왕왕 울리던 잡음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눈이 반짝 뜨인다. 자세를 고쳐 잡고 한 구절, 한 구절 꼭꼭 씹어 삼킨다.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거지. 경탄과 질투가 뒤섞인 한숨이 연이어 새어 나온다. 책장 귀퉁이를 하나 둘 접다보니 어느새 모서리만 두툼해졌다.


  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고 온다

  평생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영혼에 심어주려고 온다

  ……

  시는 아프려고 오고, 당신도

  아파야 한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나쁜 시」 중에서   

  

  나를 아프게 하려고, 내게 치유 못할 상처를 남기려고 시가 온다니.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만남은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이 영혼에 새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정작 온몸으로 시를 토해낸 시인은 얼마나 더 아팠으려나. 그렇게 시를 품은 채 나가야 할 바깥은 어디인가.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바깥에게 나를 조심스레 허락하는 일

  내가 바깥이 되고 바깥이

  도착지를 변경해주는 일

  ……

  눈동자는 바깥의 흔적

  영혼은 바깥이 쌓아올린 오두막

                                                    -「바깥으로부터」 중에서


  화자의 시선은 어둑한 블라인드가 쳐진 고속 열차의 창문 너머를 더듬고 있다.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하는 가을 산’과 ‘메말라가는 산자락의 밭’을 ‘혼자이게 내버려’두는 동안 ‘안’은 ‘모래알’처럼 작아지고 종내 ‘흙먼지’가 되어 떠돌기만 할 거라고…. 무심한 듯 담담한 경고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시인이 서문에서 말하듯 ‘인간은 다른 존재들이 지어준 가건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우린 왜 자주 오만해 지는 걸까. 그 무엇에게도 빚진 적 없다는 듯이. 바깥 없는 안은 없는 법이고, 내 눈동자와 영혼도 어딘가에 신세 진 형편인 것을.

     

  아픔은 그래서 다른 종으로 넘어가는 끓는점 같은 것

  뼈마디 사이로 불어오는 신의 숨결 같은 것     


  때로는 아픈 게 큰 싸움이 된다

                                                    -「큰 싸움」 중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사는 것만큼 속 편한 일은 없지 싶다. 부러 찾아 살피고, 미미한 목소리에게 듣는 귀가 되어 주고, 깨달은 바를 애써 나누려면 기꺼이 아프려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앓아야만 이 세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보인다’라는 구절에는 아픔의 힘을 확신하는 자의 결기가 느껴진다. 싸움 없는 안주, 아픔 없는 평온은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사는 것일 뿐이라고.

  얼마 전,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내 몸을 통과한 바깥의 슬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순간, 나는 다른 종이 되어보는 것일지도…. 얼음과 증기의 상태를 감히 상상해보지 못한, 모두가 결국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는 맹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     


  버리고 온 것들에게

  건너가는 귓속말이면 된다     


  우리가 이룬 것들을

  버리는 게 고요다

                                                     -「고요에 대하여」 중에서


  고요는 ‘순백의 무음’이 아니라 ‘인간의 소리’를 걷어내고 ‘다른 목소리’가 되살아난 상태이며, ‘풀벌레 소리와 구름을 물들인 달빛과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바람과 건넛마을의 마지막 불빛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구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정의는 어째서 이리도 아름답고 절묘한가. ‘버리고 온 것들에게 건너가는 귓속말’이 바로 시가 되겠지.


  목숨은 이렇게 흐를 뿐이다

  사랑이 이곳도 저곳도 아니듯

  설렘은 불안이거나

  미지를 향해 번쩍이는 섬광이듯

  이 시간이 끝나야 다른 시간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

  폭풍에 휩싸인 들판에게만

  고요를 품은 영혼이 있다고

                                                      -「저녁노을」 중에서


  화자는 ‘명징’에 대해 회의한다. ‘붉은 듯 검은 듯 배회하다 물소리 곁에 눕는’ 태양, 그가 만들어낸 저녁노을을 보면서. 모호한 경계, 중첩된 세상, 그럼에도 너와 내가 선연히 단절된 듯 살고 있는 사람들. “너는 나다.”라는 말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바깥과 아픔과 상처를 품은 폭풍만이 비로소 고요를 품게 되리라. 같은 책, 「옛집」이라는 시에서 말한다. ‘덕지덕지 자라고 있는 누더기가 존재의 문양’이라고. 나는 삶의 한 순간마다 어떤 바깥을 누비고 덧붙이며 내 존재의 문양을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지루한 문장을 다시 노래하게 하는’ 노을의 문양을 꿈꿔본다.


  어찌할 수 없는 때만 꼈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 빛나기도 했다

  때를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웃음은 순간 깊이를 얻고

                                                       -「때」 중에서


  세상이 말하는 관(官)이나 관(冠) 대신 ‘때’를 쓰고 살아왔다는 시인의 고백이 꽤나 능청스럽다. 때가 빛나는 순간, 때를 사랑하며 비로소 깊어진 웃음은, 버리고 온 것들을 제 것으로 삼은 자만이 누리는 경지가 아닐까. ‘버리고 온 것들에게 건너가는 귓속말’을 숨죽이며 엿들었다. 감사한 시집 덕에 내 바깥이 좀 더 넓어진 느낌. 내 안의 누더기가 또 한 꺼풀 덧대며 아프게 덩치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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