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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ug 05. 2023

'긍정'은 좋게 생각하라는 게 아니던데요

긍정과 부정정서

  요즘 저희 집 아홉 살에게 간혹 듣는 말이 있어요. 제가 걱정스러운 일이 있거나 불평을 할 때 "엄마,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꼭 합니다. 이 말을 할 때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고, 확신에 찬 눈빛을 보니 아마도 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자주 해주시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그럴 때면 피식 웃음이 나와요. 부정적인 정서가 샘솟고 비관적인 생각의 물길이 속도와 깊이를 더해가면서 부정정서의 기운이 표정과 목소리에 번져갈 때, 앞니 빠진 아홉 살이 이 말을 하거든요. 그 순간 저의 모두를 채워가던 부정 정서의 물길에서 갑자기 한 두 방울이 가볍게 위로 통통 튀어나오며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어쩔 수 있나요. 긍정해야지요.



  아홉 살이 제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좋게 생각하라는 의미였을 거예요. 우리가 늘 말하는 '좋게, 좋게.' 말이에요. 그런데 세상엔 좋은 일만 있던가요? 나도 좋게 생각하고 싶죠. 안 그렇겠어요? 하지만 우린 좋은 경험만큼 불쾌하거나 당혹스러운 일, 화가 나는 일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것도 예상치 못한 순간, 불시에 말이죠. 그럴 때마다 그 일들을 좋게 생각해야 하나요? 분명 좋지 않은걸요. 어쩌면 좋게 좋게 생각하는 건 무턱대고 덮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이건 어찌 보면 내 삶의 경험에 대한 비겁한 태도 아닐까요.



  특정한 사건에서 발생한 불안, 공포, 화, 당혹과 같은 부정정서는 위협에 대한 시그널입니다. 우리 인간은 맹수를 만났을 때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죠. 그래서 생존을 위해 대처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어요. 무기를 만들었고, 무엇보다 협력했죠. 서로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니 좀 더 낫더라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해 주었어요. 이렇게 위협에 대한 대처를 통해 우리는 진화한 덕분에 우리의 삶을 유지했어요.  




  무엇보다 눈앞의 상황이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합당한 대처요령을 세우는 명분이자 전제조건이 되어줍니다.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겐 부정정서 경험이 필수적인 것이고요.



  우리 인간은 이렇게 위협에 직면했을 때, 마냥 좋게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과정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위협을 맞닥뜨렸을 때는 위협을 그 자체로 받아들였어요. 맹수를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패배를 고스란히 담았죠. 그 이후엔 좋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건 바로 '방법이 있을 거야.'라는 희망과 낙관이죠. 그리곤 철저히 대처를 위한 실무에 들어갔을 거예요. 어떤 무기를 만들어볼 수 있을지, 어느 쪽에서 공격을 해야 성공률이 높아질지, 어떤 움직임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만들어보고 연습하고 대화를 통해 고쳐나갔을 거예요. 그 힘든 준비의 과정 끝에 성공했을 때는 그동안의 노력과 협력에 대한 벅차오르는 효능감을 느꼈을 거예요. 그 효능감은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는 희망과 낙관을 다시 낳으며 선순환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했을 때 얼마나 거대한 두려움이 몰려왔을까요. 다행히도 우리 인류가 아직도 살아있는 걸 보면 인간은 그때도 다시 생각했을 거예요. '이번 전략은 적절치 않았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다른 무기를 만들어야겠어. 이 대형보다는 다른 대형을 궁리해 보자.' 하고요. 요즘 흔히 말하는 '중꺾마'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거죠. 무엇보다 가슴에 품은 '중꺾마'를 행동으로 끊임없이 옮긴 꺾여도 계속하는 마음, '꺾계마'까지 실행했던 까닭에 우리는 아직 살아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게 생각하라는거라구요? 부정정서도 위협에 대한 대처라는 이로운 점이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긍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살펴봤어요. 익숙해서 자주 쓰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다가 그 단어를 불쑥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미안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잘 모르면서 자주 봤다고 알고 있다 여기고 그 단어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이번에도 또 저는 단단히 긍정을 오해하고 살고 있었더라고요.



  '긍정(肯定)'의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옳다고 인정함'이었어요. '긍정'은 '좋은 것'으로만 이해하기엔 긍정이라는 단어가 가진 배포가 넓었어요. 긍정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더 좋게, 나쁜 것도 좋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어요. 삶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인정하라는 거죠.



  내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위협을 위협으로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불쾌하고 화가 나는 경험도 타당하다 생각하면 인정할 수 있는 삶의 자세예요. 나의 생각과 달라 나를 당혹시키는 의견이라도 현상에 대한 비판이 논리적이고 타당할 때, 나의 부족함이 점수이든 능력이든 어떤 형식으로 드러났고 그것이 사실일 때, 우리는 그 말과 결과들에 긍정할 수 있어야 하죠. 긍정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니까요.



  옳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은 듣기 좋은 말, 만족스러운 경험, 좋은 일, 강점, 장점처럼 반짝이는 보석 같은 경험에만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들이는 건 긍정의 반쪽면에 불과해요. 살아가면서 긍정을 반만 사용하는 건 너무 가성비가 떨어지지 않나요? 긍정이 우리에게 유용한 삶의 태도라면 알뜰하게 잘 활용해야죠. 우리 삶은 꽃길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비탈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파른 길도, 희미한 목표를 향해 가고는 있지만 가는 길에 목을 축일 샘물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은 막막한 길도 가야만 하는 게 우리의 삶이었잖아요.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삶에는 반짝이는 좋은 경험들만큼 나를 힘들게 하는 경험들이 뒤섞여있듯이 나 자신도 마찬가지예요. 나를 빛나게 해주는 강점이 있는 만큼 내 자아를 콩알만 하게 만드는 약점도 있잖아요. 이때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나의 강점에만 조명을 맞추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돼요. 나를 좋게만 여기느라 나의 약점은 어둠 속에 숨거나 애써 화려한 포장지로 가려놓는다면, 그곳에 작은 빛만 비쳐도 움츠려들거나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죠. 좀 더 솔직하게 말해보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싸우거나 화를 냅니다. 또는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고 억울해하거나 남 탓을 하는 데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나를 채우는 에너지가 바닥이 납니다.



  자기 개념이 나의 좋은 면에만 치우쳐져 있을 때 타인으로 인해 화가 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공격적인 말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곤 하죠. 대부분의 경우 평온한 삶에서는 나의 좋은 면에만 조명이 비추는 상황이거든요, 그러다가 문제상황을 만나면 당황해서 화를 내게 되죠. 이런 위협 상황에서는 나의 약점마저도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처는 다릅니다.



  제 예를 들어볼까요. 제 약점은 사회성이에요. 얼마 전에 심리테스트를 해보니 하위 10%더라고요. 마흔이 되도록 여전히 낯을 가리고, 낯선 상황과 사람 앞에서 해동이 되려면 1년 정도는 걸려요. 좀 심한가요. 이 나이가 되도록 세련된 에티튜드가 없는 스스로가 참 부끄럽기도 하고 많은 순간 불편하기도 하죠. 저는 이런 약점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요. 언젠가 제 친구가 이런 저를 보고 한 마디 하더라고요.

  "김주윤 사람 된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네."

제 약점을 들킨 거죠. 이때 제가 제 약점을 알고 있지 않았으면 어떤 말이 나갔을까요? 예상이 되시죠?

  "너는?" 하고 날카로운 대응을 했겠죠. 그리고 싸웠을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저랑 친한 친구면 그 친구라고 사회성이 대단히 훌륭하겠어요. 아닐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 약점을 알고 있는 저는

  "또 들켰어? 어떻게 쉽게 안돼. 나 친구 없는 거 알지? 너희가 챙겨야 한다." 하고 웃었죠.



  또 결혼 전, 저를 걱정해 주는 의미 없는 물음이었던 '결혼은 왜 안 해요? 언제 할 거예요?'하고 질문을 받곤 했거든요. 처음 그 말을 들을 땐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나쁘더라고요. 하지만 이내 주변 친구들에 비해 늦은 것도 사실이고, 그 말을 건넨 사람도 나에게 별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나도 그 무게에 맞게 대응을 해주면 되는 거였죠.

  "오늘은 늦었고, 내일 할게요."

  "저 지금 노처녀 히스테리 부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들어주세요."

 가벼운 물음엔 가볍게 대처하는 요령도 생기더라고요.



  나를 긍정한다는 것은 나의 강점만큼 약점도 동등한 무게로 다루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점도 약점도 모두 다 나의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부정정서를 느꼈다면, 즉 불편하고 당혹스럽고 화가 난다는 것은 내가 그에 대한 대처 요령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일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 당황하게 되고 화가 나거든요.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아 내가 이 면이 부족하구나.'하고 알아채고 인정을 하는 거예요. 그다음엔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며 대책을 세워야 해요. 낙관과 희망은 이때 발휘하면 됩니다. '모든 일에는 방법이 있을 거야.' 하면서요. 사실 우리는 각자 가장 유리한 방법 하나쯤은 다 가지고 살아요. 그걸 믿으세요. 방법을 세웠으면 실천해 봐야겠죠.



  물론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경험은 남죠. 아 이 방법은 내게, 또는 이 상황에는 안 맞는 것이구나. 하는 상황파악능력은 경험한 사람에게만 남겨지는 지혜이잖아요. 그리고 성공한다면 나는 나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손에 쥐고 유용하게 나를 활용하며 살아가게 되죠. 아마 실패와 성공 사이를 항해할게 분명해요. 그렇게 내 삶의 지문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부정정서는 나를 지독히도 불편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는 부정정서를 만나게 됩니다. 다만, 부정정서와 나의 양면을 긍정했을 때 우리는 쉽게 당하지 않아요. 부정정서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우아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되는거죠.



  부정정서가 나를 위협할 때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를 성장하게 하는 시그널이구나' 하고요.  그리고 대처술을 길러보는거죠. 그 다급하게 번쩍거리는 빨간 신호에 시끄럽다며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쓸 것인가, 그 신호를 알아채고 정면으로 다가가 어떻게 해결방법을 궁리하고 연습하며 나를 키워갈 것인가는 내 몫입니다.



  나의 좋은 면만을 아끼는 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거예요. 나의 약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그게 나에 대한 사랑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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