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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May 26. 2023

시한부 직장인의 괜찮은 오늘

  남편은 연애할 때부터 60이 꿈이라고 했다. 60이 되면 은퇴를 할 것이고, 산이든 바다든 전원생활을 할 거라고 말해왔다. 자신은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땐 산으로 가고 싶다 말한다. 일상의 마른 저녁, 오늘도 자신을 소진하고 집으로 돌아온 중년 남성에게 그 꿈은 오늘 일터에서의 힘듦을 달래주는 소중한 희망이다. 저녁을 먹으며 호주머니에서 알사탕을 꺼내듯 은퇴의 꿈을 이야기 할때마다 그는 마른 화분에 물을 주듯 마음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그때마다 나는 눈썹과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을 똥그랗게 뜨며 장난스레 말했다.

  "남편, 나보다는 더 일 해야지. 65살까지는 한다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남편의 부푼 마음에 약간은 미지근한 물 한 바가지를 부었다. 나는 정년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부터 내가 언제까지 직장을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그런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기에 준비되지 않은 생각은 참 막연했다. 대부분의 막연함은 불안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참 신기하게도 퇴사에 대한 막연함은 점점 기대로 변했다.  

'그만 두면 어떨까?'

'나도 곧 그만두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특히나 아침 출근을 위해 무거운 몸을 겨우 세워 아무 생각 없이 샤워부스로 향해 긴 머리를 감을 때, 그리고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때 그런 생각이 자주 들곤 했다.



  처음엔 이 낯선 생각이 저 멀리 있는 듯했지만 자주 생각할수록 그렇게 이 생각과 자주 만날 수록 우린 친해졌나 보다. 퇴사라는 게 나에게도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서서히 내 마음속에는 언젠가는 이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 기대는 늘 게으르고 안온한 아침에 대한 상상을 함께 가져왔다. 고요를 선택한 어떤 아침은 클래식 fm을 켜두고 느리게 커피 한잔을 마실 것이고, 어떤 아침은 두 팔을 휘휘 저어가며 씩씩하게 동네 산책도 할 요량이다. 좋은 봄날 테라스 카페에서 지인들과 차 한잔을 하는 오후도 떠올랐고, 봄가을의 아름다운 평일에는 가보지 못한 부산, 경주에도 가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내가 지금 누리지 못하는 여유들이 한달음에 찾아와 나에게 와락 안겼다. 그때마다 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이 간질거리는 마음을 보며 그제야 알았다. 그래서 직장인의 꿈이 퇴사였던 거구나.



  퇴사와 함께 안온한 앙금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생각이 결정이 되어 떠올랐다.

  '내가 퇴사를 하더라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내가 내 상황에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때, 내가 선택을 하자.'



  내 삶의 키를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내가 가진 중요한 삶의 가치이다. 나는 내 선택에 의해 내 행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진심으로 참여할 때 자존감을 느껴왔다. 나는 아무리 번거로운 일도 내가 선택한 일이면 다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참여하는 일에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정말 사소한 일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마디로 나는 '주윤 패싱'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나의 퇴사도 상황에 의해서가 아닌 내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과연 나는 어느 순간 퇴사를 결정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상황이 가능하다. 더이상 내 능력이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내 능력에 대한 부족. 그리고 내가 충분히 진심으로 일 했다는 자부심. 이 두 가지라면 나는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까지 첫 번째는 느껴보지 않은 상태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나는 두번째 조건이 필요하다.



  나는 올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예전보다 더 세심히 일을 살폈고, 불만을 줄이는 대신 너그러움의 면적을 넓혔다. 업무에 충실히 준비했고 과정 중에 진심으로 일했다. 동료들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면 정말 미안했다고 꼭 말했고, 함께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존중하며 귀와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내 직업환경이 꽤, 퍽, 굉장히 괜찮아져 버렸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오늘 직장에서의 만족스러움이 잔잔히 출렁거렸다. 내가 존중하는 만큼의 존중이 나에게 와닿고 있음이 느껴졌다. 뭐지? 난 언젠가는 퇴사할 건데. 그때 이 마음들이 부러워지면 어떻게 하지? 익숙한 업무를 자동적으로 해나가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생각이 아닌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움직이곤 하지만, 때때로 업무를 하는 순간순간에 희열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상태라면 나는 90까지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에게도 90까지 일해야지! 하고 말했다. 나는 그의 꿈에 찬물을 확 끼얹고야 말았다. 큰 일이다.



  내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오만한 나는 언제나 내가 경험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오늘이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는 보편적 문장에 공감하지 못했다. 이제야 이 문장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진심으로 끝을 그려보았을 때, 그 끝이 내가 바라는 모습이기를 간절히 원할 때, 그 간절함만큼 나는 오늘의 삶에 충실해진다.



  시한부 직장인이 된 나는 오늘 일의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어쩌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고, 일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능력을 발견하며 그제야 나를 알아차리기도 한다. 나를 발견하는 보물 찾기는 언제나 내게 활력을 준다. 일을 할 때 발견되는 나는 직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의 모습이기에 여기에서 나를 더 찾아보는 일도 꽤 괜찮다.



 더욱이 나는 나에게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게 좋다면서 나에게 더 관심을 쏟는다고?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무엇일까. 모든 이유는 하나이다. 나는 시한부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만둘 나는 퇴사 이후엔 갓생을 살아야지 않겠나.



  직장이 사라지고 퇴근 이후의 삶이 내 하루의 전체가 되는 날, 내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날이었으면 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더 세세히 좋아하고 싶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하나를 몇 주 동안 집중적으로 듣고, 한 모금이 들어오는 순간 만족을 주는 향을 가진 와인의 생산자와 품종, 이름을 외우려고 한다. 관심 있는 작가의 신간을 찾아 읽고, 선호하는 출판사를 팔로워 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면 시집에 도전해보고 싶다.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한 번, 메시지 한 번을 더 보내보려 한다. 엄마와 아빠, 언니에게, 동생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남편에게 한번 더 장난을 치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들을 한번 더 꼭 안아준다.



  퇴사 열풍은 이렇게 내게 시한부 직장인의 삶을 쓱 건네주었다. 내가 원하는 끝을 위해 나는 오늘의 삶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니 내가 원하는 끝이 선명할수록 내 오늘의 가치가 분명해졌다. 나와 내 주변을 존중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끌어당기는 하루를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데려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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