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나는 말이 적고 목소리도 작은 사람이다. 엄마와도 필요한 때만 연락을 하는 무심한 딸이고, 친구들과도 약속을 잡을 때만 연락을 한다. 네 명이 넘어가는 모임에 가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일부러 참는 게 아니다. 정말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제 일상을 꺼내어 나누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부럽다. 신기하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추며 듣다 보면 유려하게 대화를 이끌던 세심한 화자는 나에게도 자연스레 말을 건다.
"주윤 씨는 어때요?"
아! 삐뽀삐뽀! 청자에서 화자로 모드 체인지를 해야 하는데 나는 순간 반응속도도 느려서 버벅거리느라 순간 눈이 똥그랗게 커지고 만다.
"아, 아! 저는, 어, 아하하하하."
정말 바보 같은 순간이다. 내 흔들리는 동공을 확인한 세련된 상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생각해서 나에게 말을 건네준 것이었을 텐데. 아마 그녀도 내 흔들리는 동공에 적잖이 당황했을 거다. 나는 그제야 휴, 이제 나에게 말 걸지 말아라. 하며 또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눈을 맞추며 듣는다. 그러다 나도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아 말을 하면 내 작디작은 아담한 목소리는 묻힌다. 허공으로 갔나 땅으로 꺼졌나. 대화에 안착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이미 말끔히 흔적도 남기지 않고 휘발되었다. 그러면 또 주눅이 들어 그냥 가만히 있기로 한다.
"자기, 정말 낯가리더라. 아까 눈빛이 흔들리는 거 봤잖아."
"언니, 저 부끄러움이 많답니다."
저 낯가려요. 했을 때 나도 그래. 했던 언니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집에 가는 길 내내 조금 전에 들은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저는 요즘 결국엔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사랑은 남녀, 부모 자녀, 그리고 친구, 나에 대한 사랑에서 더 넓게 보면 내 삶과 운명, 세상에 대한 사랑까지 점점 넓어지더라고요."
왜 이렇게 말 못 했을까! 아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왜! 왜! 운전을 하는 내내 조금 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복기하고 되뇐다. 아무도 못 듣는 내 차 안에서. 그래, 나라도 듣는다. 에잇.
어디 가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내가 수업시간만 되면 귀신이 들렸나 싶게 말을 해댄다. 오늘은 인지주의를 학습하는 날이다. 지난 시간에 배운 행동주의의 환원주의에 대비하여 인지주의의 전체론이 가진 인식론의 차이와 인지주의의 게슈탈트 심리학이 말하는 전체는 부분의 합 그 이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을 설명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대표적인 그림인 루빈의 물 잔을 보여주며 무엇이 전경으로 보이는지 묻는다. 하나의 자극에 하나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 행동주의라면 하나의 자극에 학습자에 따라 여러 반응이 나올 수 있음이 인지주의임을 설명하며
"하나의 자극에 하나의 반응이라면, 여러분의 중간고사 시험지의 답은 다 같아야 합니다. 저라는 하나의 스피커, 하나의 외부적 지식인 교재를 놓고 공부했지만 여러분의 시험지는 다 다르죠."
하는 순간 학생들은 제 중간고사 시험지를 떠올리며 멋쩍은 웃음을 띤다.
"캠퍼스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여러분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떤 누군가는 뭐야, 왜 쳐다보는 거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런가 보지.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나 좋아하나?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게 인지주의가 생각하는 인간관입니다. 인간은 경험에 대한 주관적 편집권을 가진 능동적 존재입니다. 인식(perception)은 실제(reality)와 차이가 있는 거죠. 우리는 객관적인 삶의 사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어떤 인지구조, 해석의 틀을 발휘하느냐가 중요하죠. 결국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그렇게 인지주의를 행동주의와 비교하거나 인지주의의 인식론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한다. 그러느라 주어진 시간을 오늘도 다 써버렸다. 고백하자면 쉬는 시간 10분을 5분만 쓴 덕에 그나마 시간 내에 강의를 마쳤다. 오늘도 나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괜히 찔려서 학생들에게 고백한다.
"제 강의의 목표는 늘 하나예요. 빨리 끝내 드리는 것."
학생들이 피식 웃는다. 응? 잘 못 들었나? 뭐라고? 실상과 말이 전혀 일치하지 않을 때 나오는 실소. 나 역시 오늘도 지난주에도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쉬는 시간 없이 갈까요?"
"5분만 쉬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가르치는 내가 가르치는 일을 잘 해내도록 일상의 나는 말을 줄였나 싶다. 일상의 나는 조용히 지내며 말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주섬주섬 꾹꾹 눌러 모아 가르치는 나에게 한 가마니씩 쾌척하나.
사는 데 전혀 계획이 없고 철두철미함과는 거리가 먼 내가 그랬을 리 만무하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일상에서 친화력과 화용언어능력은 떨어지는 나도 한 가지 마음이 있다.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 좋은 곳을 다녀오면 좋아하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마음. 우연히 다녀온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며 가을을 느끼고 돌아오면, 좋아하는 친구에게 그곳에 가자고 한다. 어렵게 예약한 해남의 유선관에서 봄을 누리고 와서는 20년 지기 친구들과의 가을여행에 유선관을 보여주고 싶어 예약창이 열리는 날, 눈에 불을 켜고 손가락에 모터를 달고 마음을 모니터에 잔뜩 모아 예약을 해냈다.
내게도 있다. 메시지를 받고 전화를 받기만 하는 소극적인 내가 먼저 연락하고 먼저 전화를 거는 순간. 내 정서를 풍요롭게,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던 경험을 나누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떠오른 날, 들뜬 나는 기어이 한껏 부풀은 마음을 담아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한다.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말을 하게 하고 연락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수업이 내게는 그렇다. 공부를 하며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배움은 고약해서 세상엔 네가 모르는 게 참 많단다 하며 매번 드높은 벽 앞에 나를 서게 한다. 참 굴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 나의 모자람을 인식하고 겸손함을 가지고 한 글자씩 읽고, 내 손으로 정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단단하던 벽은 자상하게 내 손을 잡아준다. 이만큼만 이해해도 된단다. 네 몫만큼 이해하렴. 그러다 다시 보면, 그리고 계속 보면 더 넓고 깊게 보일 거야. 이 정도도 괜찮아. 하며 다독여준다.
글을 읽을 때마다 내 생각의 틀은 늘 새로운 인테리어를 해갔다. 오늘은 주방에 선반을 하나 더 달아서 새로 들인 그릇을 좀 더 정갈하게 정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어떤 날은 흐릿해서 이해가 안 되던 방에 새로운 전구를 갈아 끼워 드디어 그 방에 지식들이 보일 수 있게 해 주었다. 배움은 그렇게 나를 고쳐가고 구석구석에 전구를 밝혀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좀 더 겸손해졌고, 세상에 대한 해상도를 높여갔다. 내가 더 좋은 사람으로 고쳐지고 있다. 읽을수록, 그리고 쓸수록.
나는 배움이 좋다. 배우고 있는 내가 좋다. 내 생각의 면적을 키우고, 나를 고쳐 쓰는 나의 방법인 배움이 나를, 내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데려감을 알고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 앞에 움직이는 나는 배움을 나누고 싶다.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든 키우고 싶어 빨간 불이 들어오는 마이크를 초록불까지 충전을 하고, 생소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용어를 정리하고, 예시를 찾아보고, 관련 영상을 찾는다. 책을 읽다가 이건 에릭슨적 사고야! 이건 프로이트 적 사고야! 하는 부분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노트에 옮겨 적은 후 강의자료에 반영한다. 나의 학생들과 함께 읽고, 쓰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과정에 늘 나를, 내가 만난 학생들을 데려다 놓고 싶다.
제 경험을 무조건 옳다고 하면 꼰대라 한다. 나는 중년이라는 충분한 나이, 한 직업에서 20여 년이 다해가는 경력, 고지식한 성격, 좁은 식견, 무엇보다 선생이라는 직업까지. 꼰대로서의 완벽한 오각형을 갖춘 사람이 맞다. 이쯤 하면 갓꼰대쯤 되겠지 싶다. 갓꼰대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게 다행이다. 가르치는 나는 말하고, 움직이고, 어떤 나보다 자신이 있고, 적극적이다. 학교는 배우는 곳이니까.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움을 함께 나누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니까. 배움이 가장 귀한 일이 되는 곳에서 나는 자주 좋을 수밖에.
2024. 10. 23(수)
제목: 요즘 나는 이 재미로 산다.
요즘 나는 학교 가는 즐거움으로 산다. 왜냐하면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놀 수도 있기 때문이다. 1석 2조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예전에는 왜 학교를 5시간씩이나 다니냐고 귀찮아하고 별로 안 좋아했지만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더 좋아진 것 같다. 주말엔 학교를 못 가지만 숙제를 하고 나서 밖에서 친구들(보통 연우, 찬우, 3반 친구)이랑 놀면 학교랑 비슷해져서 그렇게 하는 중이다. 학교 말고 게임도 좋아하긴 한데 학교보단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 정말 오고 싶었죠!" 너스레를 떠는 내 말에 늘 "아니요!"하고 야유를 보내던 우리 반 승유도 내 학교예찬에 물들어버렸다. 좋아하는 마음에 물들기는 쉽다. 왜냐면, 좋아하는 마음은 늘 진심이니까. 우리의 좋아하는 마음, 우리의 진심은 오늘도 학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