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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Oct 27. 2024

너의 세상을 궁금해하는 마음

학교심리 자폐스펙트럼

  지난 1년간 내 점심 짝꿍은 민우였다. 민우는 수박과 푸딩을 참 좋아했는데 큰 키와 다부진 어깨에 비해 밥은 젓가락으로 몇 알씩 집어먹는 게 전부였다. 볶음밥이나 비빔밥이 나오면 민우는 채소와 소스를 걷어내고 더 작은 흰 밥 부분만 골라 먹느라 젓가락에 붙어오는 밥알은 더 귀했다. ‘흰 밥만 먹는구나!’ 행여 볶음밥이나 비빔밥이 나오는 날엔 나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민우 뒤에 섰다.

  “민우는 볶음밥 괜찮습니다. 민우야 우리 저 옆에 흰 밥 먹자.”

수박을 먼저 먹고 밥알은 세고 있는 걸 보면 언제나 궁금했다. 집에서는 잘 먹나? 그래도 오후에 수영을 가는 민우가 배고플까 봐 권해본다.  

  “민우, 수영 가야 하잖아. 이렇게 먹으면 배고플 텐데.”

그래도 민우는 대답이 없다. 다만 가끔 내 얼굴에 제 얼굴을 마주 대고 “히--”하고 웃을 뿐이다. 민우는 그렇게 나를 보고 잘 웃는다.           



  민우가 웃을 때면 크림빛 뽀얀 피부에 돌돌이 굵은 색연필로 그린 듯 정직한 검은색 일자 눈썹이 팔자가 된다. 저항 없이 양끝이 내려간 눈썹과 봉긋 솟아오르는 볼에는 천진함이 가득하다. 사회적 미소가 애초에 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인 민우의 얼굴에 내린 그 구체적인 천진한 미소를 마주할 때마다 일상의 낡은 나는 새 하얀 눈덩이를 와락 맞는 듯했다. 하얀 미소가 내리는 순간, 내 구태의연한 일상의 먼지들이 하얀 눈에 가라앉았다. 내 마음이 잔잔한 하얀빛으로 환해지곤 했다.         


 

  우리는 점심을 정리하고 식당 밖으로 나온다. 거의 매일 나는 민우에게 말한다.

  “손 씻을 거지? 선생님은 화장실 다녀올게. 손 씻고 여기서 기다려.”

  “....”

  “네, 해야지.”

  “네.”

화장실에서 나오자 민우 옆에 도움반 선생님께서 계신다.

  “민우가 아무리 교실로 가자고 해도 안 가더라고요. 선생님 기다렸던 거군요.”

  “아! 제가 잠깐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민우는 나를 기다렸다. 민우는 급식친구와 약속을 지켜내는 의리 있는 친구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민우의 표정이 상상되었다. 교실로 데려다주겠다는 도움반 선생님의 다정한 말씀에 민우는 약간 찡그리고 작은 소리를 냈겠지. 그리곤 꿈쩍하지 않고 바닥만 보고 버티고 서 있었을 거다.           



  나와의 약속이 언젠가부터 민우의 마음에 닻을 내렸을까. 민우와 나 사이에 가느다란 실이 연결된 것이 선명해진 오후, 이 사실에 나는 마음이 간질거리며 가볍게 울렁거렸다.   

  “민우야, 밖으로 걸어갈까, 실내로 갈까?”

  “밖으로...”

  “그래! 우리 무 화분이랑 토마토 화분도 보러 가자.”

  그렇게 어린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활기로 가득 찬 점심의 교정을 우리는 걷는다. 그렇게 교실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에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내렸었다.         


  

   어린이들의 봄은 어른의 봄과 다르다. 어린이들은 3월 새 학기에 각자의 성향과 태도의 총천연색으로 빛을 낸다. 사회적 표정이 묻지 않은 얼굴, 날것의 말투, 다듬어지지 않는 태도. 각자 삐죽삐죽하고 울퉁불퉁한 자아를 내뿜는 게 3월의 어린이가 맞다. 그들의 울퉁불퉁함에 나는 말랑말랑한 클레이가 되어 쏙쏙 그 틈 사이에 들어가 계곡을 메우기도 하고 날카로워서 남의 마음을 해치는 뾰족함을 근엄하게 사포질 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뾰족함에 대해 내가 제 말투와 표정에 찰싹 달라붙어 한 마디를 하면, 어린이들은 반응이 있기 마련이다. 한쪽씩 각자의 색이 담긴 실을 잡고 서로 주고받으며 꼬이고 두꺼워지는 반응들이 나와 어린이들 사이에 얽힌다. 그 시간들이 겹쳐지며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서로를 더 존중하고 아끼는 시간들을 가지며 커간다.           



  그 뾰족함이 가장 도드라지는 시기는 봄이다. 새로운 시작의 봄. 그래서 하루가 참 길고 한 달이 참 긴 3월. 민우를 처음 만났던 것도 봄이다. 모든 새로움이 다 몰려오는 봄에 낡은 나는 자폐스펙트럼과 발달지연을 겪는 민우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를 몰랐다. 자폐스펙트럼을 겪는 어린이를 처음 만나본 나는 끌어다 쓸 행동요령이 없어 당황했고, 민우는 낯선 내가 두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봄은 참 서로 서툴렀다. 민우만의 뾰족함과 울퉁불퉁함은 보이는데, 내가 달라붙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는 민우에게 고루한 행동요령인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

민우는 내 팔을 꽉 잡았다. 싫음이 묻어나는 그 손엔 힘이 있었지만 동시에 힘이 없었다. 나는 힘없는 민우의 손만큼 희미하게 알아챘다. 싫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민우에겐 참 중요한 일임을.      


     

  그날부터 민우의 싫음을 나는 존중하기로 했다. 어느 가을날, 민우는 교실로 가지 않겠다며 교정에 주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여름의 너그러운 햇살에 가을의 푸른 마른바람이 섞여 불어오던 오후였기에 나도 함께 화단과 길바닥 사이에 주저앉았다.

  “민우 가기 싫어? 그래! 가지 말자!”

주변에 우리 반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덕분에 민우와 내가 화단과 길에 앉아있는 게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을 국화처럼 땅에 앉아 등 뒤로 쏟아지는 가을 오후를 한참 맞았다. 기대했던 일이 무산되어 나에게도 유난히 몸과 마음이 피로하던 가을날이었다. 쉼표 같은 그 시간이 참 내게 참 달았다. 이윽고 민우는 후다닥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의 빠른 걸음으로 교실로 향했다. 민우의 싫음에 내가 덕을 본 오후였다.          



  다만 나는 해야 할 일을 알려줘야 하는 사람이다. 수업시간엔 “싫어!”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민우, 교과서 가져와야지요.”

  “싫어!”

  “수업시간에는 좋아요 해야지. 민우 사물함 여기 있네, 가져와야지요.”

그러면 민우는 사물함으로 와서 교과서를 가져간다. 꼭 이렇게 한 번 튕긴다. 미술 활동에서    “싫어!” 하는 민우의 말에

  “민우, 수업시간에는 좋아요 해야지. 다른 친구들도 다 하고 있지? 민우도 하자.”

하며 연필과 종이를 들이대곤 했다. 손에 묻는 것을 싫어하는 민우였지만 미술시간에 사인펜과 색연필로 열심히 색칠을 하곤 했다.

  “민우! 작품 들고 선생님 보세요!”

하는 내 말에 또 “히익-!”하고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민우는 초등학교 5학년이지만 유아의 발달모습을 보인다. 색칠과 만들기 속도가 빠르고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다. 둥글고 몽글몽글한 고운 글씨로 제 생각을 짧은 단어로 쓰거나 보고 따라 쓰기를 잘하고 글밥이 적은 동화책을 읽는다. 수영을 잘하는 덕분에 키도 크고 건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다.     


      

  민우는 세상을 자잘하고 개별적으로 반짝이는 구체적인 눈과 코와 입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아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망이 누구보다 촘촘하면서도 천진함과 투명함이 있어 세상을 상세하고 단순하게 본다. 민우가 가진 구체성의 자잘하고 개별적으로 반짝이는 세계를 나는 추상의 세계라는 진한 색으로 덮고 있는 사람이다. 제 만의 필터로 세상을 보는 아이에게 나는 추상화를 통해 통일된 세상의 필터를 끼워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내 역할이다.           



  민우에게 5학년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을 내밀 때마다 나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시인 레베카를 떠올렸다. 올리버 색스는 궁금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담자들에게 귀 기울였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지어주는 그가 참 다정하다 여겼다. 그는 민우의 능력이란 보통의 규칙 아래에서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모두에게 같은 규칙과 내용이 진행되는 보통의 학교에는 민우의 결함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에 불과할 수 있다. 세상에 틀에 맞추기 위해 변형과 상실이 되지 않은 채 민우에게 남아있는 날것의 능력을 나는 궁금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능력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막는다. 민우가 어떻게 행동할지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수상체험을 하러 가는 날, 민우는 버스에서부터 신이 났다. 다만 나와 도움반 선생님은 걱정이 바닥부터 쌓인다. 바나나보트와 수상보트를 탈 때 손을 놓치면 어쩌지. 민우의 그룹 차례가 왔다. 낯선 상황에서 민우는 약간 긴장해서 찡그린 얼굴로 다른 친구들처럼 신발을 벗고 보트에 올라탔다.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허리를 숙여 배를 보트에 밀착하는데 실패한 민우는 일단 보트에서 나왔다.

  “민우야, 무서우면 안 타도 돼. 신발 신고 나갈까?”

민우는 신발을 신지 않는다. 가만히 그 자리에 맨발로 서 있었다.

  “타고 싶어?”

  “네...”

민우는 여느 때처럼 끝을 올리며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사실 나는 민우가 타지 않겠다고 하길 바랐다. 보트에 타는 일에는 민우를 대신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일이다. 민우가 제 손으로 제대로 손잡이를 잡고 스스로 버텨야만 하는 활동이다. 나는 민우가 행여 손잡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 물에 빠질까봐. 행여 큰 일이 날까봐. 행여, 그리고 또 행여. 그 행여는 걱정과 긴장을 엮고 또 엮어만 갔다. 도움반 선생님은 다행히 나보다 경험도 마음도 더 큰 분이셨다.

  “민우야, 그러면 이번에 다른 친구들 어떻게 타는지 한번 보고 다음에 탈까?”

절대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민우는 기다렸다. 다음 턴에 민우는 친구들과 다시 보트에 올라탔다. 같은 반 친구는

  “민우야, 여기 꽉 잡아!”

하고 제 손을 가져다 민우 손을 잡아 손잡이에 가져다준다. 민우는 손을 꽉 잡고 몸을 보트에 숙이며 열심히 바람을 맞았다. 민우는 바람을 맞아 젖혀진 머리카락과 젖은 종아리, 상기된 표정을 가지고 수상보트에서 내려왔다. 그제야 제 스스로 벗어두었던 신발을 신었다.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보니 웃음이 난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민우의 선명한 해냄에 내 마음이 벅찼다.      



  이젠 다음 활동으로 이동할 차례다. 저 쪽에서 낯선 얼굴의 다른 반 아이들이 활동을 바꾸기 위해 나와 민우 쪽으로 달려온다. 민우는 내 팔 안쪽을 쓱 잡는다. 나는 순간 놀랐다. 평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걷거나 언제나 “같이 가” 해도 나보다 한 두 걸음 빨리 걷던 민우였다. 이 손은 민우의 두려움과 나에 대한 의지를 담은 손이다. 낯선 아이들을 지나가니 민우는 손을 빼고 빠른 걸음으로 내 앞에 걷는다. 내 팔 엔 민우의 연약한 손이 서툴렀던 지난봄을 데려온다. 근엄한 표정을 한 내게

“싫어.”

하며 내 팔을 쥐었던 그날과 같지만 전혀 다른 민우의 손. 이젠 나도 필요한 사람이 된 듯한 선명한 느낌. 민우의 손이 남긴 파동이 내 마음에 여운을 남겼다.      


     

  낡은 눈과 마음은 늘 낡은 상상을 덧입히는 게 습관인가. 처음 민우를 만났을 때 나는 민우가 가진 구체성이 참 궁금했다. 올리버 색스가 레베카의 구체성과 능력을 발견했듯이 나도 단번에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드라마틱한 능력을 가진 자폐스펙트럼을 하나의 지표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달력을 다 외운다던지, 숫자를 다 암산으로 계산한다던지, 뭐하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대형 고래를 그렸다던지와 같이 미디어에 소개된 자폐스펙트럼의 특별한 능력을 민우에게서 찾고 싶어 했다. 민우를 궁금해하고, 민우의 좋고 싫음에 귀 기울이기보다 나는 그 특별함을 발견하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실상 나도 먼지와 같은 보통의 사람인데도. 아니면 내가 너무 평범한 까닭에 민우에게 특별한 능력을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낡고 오염된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는, 반도 모르는 사람의 경솔함은 늘 이렇게 구체적 사실보다 모호한 상상을 앞세운다.           



  하지만 내 능력은 부족했다. 그 까닭에 나는 민우를 경험했다. 급식짝꿍을 하며 나는 겨우 수박과 토마토, 푸딩을 좋아하고, 요즘엔 피자와 치킨을 좋아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체험활동을 하며 민우가 수영과 물을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민우의 싫어를 살살 달랜 덕분에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것,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쌓이는 시간 덕분에 맑게 웃는 것, 가끔은 내 말에 반응하는 것, 미소를 띠고 말을 하면 한번 튕기고도 잘 듣는 것,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 편안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체적인 민우를 알고 나니 낡은 내 상상이 얼마나 납작했는지가 선명히 보였다.  


        

  산다는 건 긴 호흡이다. 나에게도 민우에게도. 마흔 인 나도 나를 모르는데 민우가 제 이야기를 모르는 건 자연스럽다. 민우는 어린이니까. 보통의 내가 좋고 싫음을 경험하며 정체감을 형성하듯 제 능력과 힘을 알아가는 경험이 쌓여야 민우도 제 이야기를 가지게 된다. 다만 민우의 속도는 조금 더 느릴 것이고 조금 많이 주저하게 될 것이다. 그 까닭에 민우는 제 좋고 싫음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맞다.   


        

  민우의 자람에 지나가는 한 사람으로 내 역할은 싫어와 좋아요를 존중해 주는 일이다. 민우를 궁금해하는 일이다. 민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질문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개별적인 고유성과 구체성을 발견하며 그가 가진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일이 내 일이다. 섣불리 안된다고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내가 잊지않고 노력해야하는 또 하나의 내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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