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학교상담 학부모상담
점심을 먹고 4층 교실로 올라오면 하루의 무게를 책가방에 넣고 하교하는 어린이들이 교실에 여전하다. 하굣길 책가방의 무게는 구름처럼 가벼워서 그보다 더 명랑한 소란들이 교실에 여운을 남기며 인사를 건넨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주말 잘 보내세요!"
"응! 주말 잘 보내!"
나는 교탁 밑 네모난 서랍에서 치약을 꺼내 칫솔에 짜서 입에 문 채로 어린이들의 명랑함에 가벼운 손인사를 보내며 복도의 세면대로 간다. 소란한 교실의 소리들이 페이드아웃되며 나는 세면대에 서서 양치를 한다. 양치를 하고 나면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다. 완벽한 오버랩의 순간이다.
교실도 표정을 바꾸었다. 어린이들이 빠져나간 고요한 교실에 들어서면 어린이들이 앉아있던 자리의 형광등은 끄고 교탁 쪽 형광등만을 켜둔다. 한낮이지만 교실에 명암이 생긴다. 나는 더 이상 서있지 않는다. 수업하느라 내내 서있던 나는 의자에 앉는다. 오늘은 지난 1학기의 학업성적을 정리한 엑셀파일, 행동을 누가기록했던 파일, 또래관계를 조사했던 설문, 가정환경조사서를 준비한다. 이번주는 상담기간이다.
"찬우는 1학기에 수학과목에서 수와 연산, 도형, 측정 전 영역에서 고루 성취가 우수해요. 수학적 개념을 말로 잘 설명하고, 사고력이 요구되는 문제도 문제가 요구하는 것과 조건을 파악하여 해결하는 역량을 보입니다."
"지난 3월에 상담을 갔을 때 선생님께서 진단평가 시험지를 보여주셨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찬우는 학교 수학수업이랑 수학 익힘 숙제만 해도 수학 잘하고 있다고 말했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구요. 그런데 그때 진단평가 시험지 결과가 1-2학기 모두 60점이었어요. 좀 충격을 받았어요. 집에 가서 찬우랑 이야기를 해봤어요. 수학 시험이 어려웠는지 물었더니 기억이 잘 안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집에서 문제집을 사서 수학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찬우도 이제 따로 공부해야겠다고 느꼈더라구요. 3월에 바로 말씀해 주신 게 적기였어요."
"다행이네요. 3월에 함께 고민했던 찬우의 말투도 좀 더 다정해졌습니다. 찬우도 신경 쓰더라고요. 지난주에 썼던 주제글쓰기에서 찬우가 친한 동생에게 큰 소리로 말해서 동생이 울었다는 내용을 쓰면서 말투와 큰소리로 말하는 행동을 신경 써서 고치겠다고 하더라구요. 찬우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고치려고 하는 힘이 늘 찬우를 도울 것 같아요.
실수에 대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태도에서 상대의 입장을 살피는 태도로 발달한 게 보입니다. 오늘 교실에서 찬우와 평소에 잘 놀던 친구가 저에게 와서 찬우가 놀다가 자기 머리를 때렸는데 기분이 나빴다고 해요. 그에 대해 사과받고 싶다구요. 저랑 그 친구가 하는 대화를 찬우도 귀를 쫑긋 하고 듣더니, 알겠다고 하더라구요. 1학기 초 같으면 자신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먼저 말하며 어필했을 텐데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구요.
이런 모습들에서 찬우가 자기 중심화 경향에서 이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쪽으로 발달하는 게 보입니다. 찬우가 참 많이 컸죠. 부모님께서 찬우와 이런 일들에 대해 자주 대화해 주시고 지지해 주신 덕분이지 싶습니다. 지금도 잘 크려고 애쓰고 있는 찬우가 보입니다."
"준서 요즘 학교 생활에 대해 어떻다고 하던가요?"
"학교 애기를 시시콜콜하게 하는 편이 아니긴 해요. 그래도 한 번씩 물어보면 학교 가면 마음이 편하대요. 지난번에 아팠을 때 학교를 못 갔잖아요. 그때 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작년엔 학교 가기 싫다고 해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때는 제가 너무 속상했는데, 올해는 걱정을 덜었어요. 그래서 저도 제 생활을 좀 할 수 있게 되어서 편안해졌어요. 감사해요, 선생님."
"다행입니다. 준서가 좀 더 크고 단단해졌나 봐요. 가정에서도 좋은 이야기 해주신 덕분이에요. 지난 1학기부터 제가 준서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집에서 30분씩 꼭 책 읽기, 40분 동안 수학 공부하기를 하라고 하거든요. 했는지도 물으면 이제 문제집을 사려고요. 엘리하이를 하기로 했어요. 하고 말하더라구요. 제가 준서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요. 일단 준서가 국어 지문을 읽고 해석하는 힘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1단원이었던 분수파트에서도 가분수에서 대분수로 바꾸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수학개념이 약한 상태이구요. 단원평가 수행 수준도 낮은 그룹에 속합니다.
제가 준서에게 공부를 하라는 건 무조건 공부를 잘 해야만한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세상엔 여러 길이 있고 준서도 준서의 강점이 있으니까요. 다만, 준서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큰 아이더라고요. 특히 친구들에게서요.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웃으며 생활하는데 다만 허세라고 하죠. 이런 게 있더라구요. 그런데 준서가 체구도 작고, 수업 내용에 대해 어려움을 겪잖아요. 준서는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허세도 있는데 물리적으로 인지적으로 따라주지 않는 상황이 있으니 어머님도 아시는 문제행동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체구는 작은데 쎄보이고 싶으니 욕을 하기도 했고, 괜히 친하고 싶은 친구 앞에서 힘자랑을 한다고 의자를 들어 올리거나, 게임 현질을 과장해서 말하기도 하구요.
이제 고학년이 되면 학업의 난이도가 오르고 양이 많아집니다. 학업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준서가 많이 겪게 되고, 거기에서 실패경험을 하게 되면 또 준서의 인정욕구가 충족이 안되기 때문에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여타 행동을 할 우려가 있어 보입니다. 준서가 학교 공부를 어느 정도는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예요.
동시에 준서는 자기가 잘하는 것 하나는 확실히 있고, 그걸 본인도 알고 있어야 하는 아이입니다. 그것을 찾아주고 강점을 쥐게 해 주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올해는 준서가 특히 욕을 안 하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잘 지키고 있잖아요. 그런 준서를 보면 대견하고 준서의 힘이 느껴지죠. 학교공부도 복습을 위주로 하는 걸 추천해요. 국어교과서 지문 하루에 3번씩 읽고, 교과서에 있는 문제에 답도 달아보구요. 수학도 교과서 문제를 충실히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세요. 학교에서도 잘 지켜보겠습니다."
"혜윤이가 친구들과 지내는 게 걱정되시죠. 혜윤이는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요. 다만 친교활동에 자신감이 있는 편은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긴장도가 있는 편입니다. 사실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실수를 하잖아요.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구요. 그럴 때 라이트하게 '아! 그랬어? 미안해.' 한 마디면 되는데 혜윤이는 긴장도가 높다 보니 자신이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친구들이 혜윤이를 쳐다보거나 왜 그래? 하면 바로 째려보거나 '네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 하는 공격성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체육시간에도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가며 하는 농구형 게임을 하는데 혜윤이는 체육도 좋아하잖아요. 분명 혜윤이는 수비를 먼저 하기로 했는데 공격 쪽으로 가버리게 된 거예요. 룰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위치를 몰랐을 수도 있고, 또 공격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죠. 문제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야! 너 수비잖아. 저기로 가야 해.'하고 말했을 때 혜윤이가 '아! 진짜?'하고 가면 되는데 '뭐! 어쩌라고!' 하면서 째려보고 제 자리로 가는 거예요.
제가 봤을 때 혜윤이는 그 상황에 민망했어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 규칙을 어겼다는 것도 알아차렸죠. 그래서 방어기제로 반대로 행동하는 반동형성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상대친구는 불쾌하죠. 분명 잘못한 건 혜윤인데 자기에게 되려 성을 내니까요. 당연히 혜윤이는 친구와 저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게 됩니다. 즉 혜윤이의 실수가 상대의 반응을 가져오는데, 그때 혜윤이의 공격적인 말투와 눈빛은 상대를 불쾌하게 하고, 친구들은 참지 않고 혜윤이에게 직접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거나 저에게 지도를 요구해요. 이게 순환이 됩니다. 친구가 좋은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상황이 잦아지면 혜윤이의 낮은 친교관계의 자신감은 더욱 긴장하게 되죠. 그게 우려되는 점입니다. 행여 사춘기가 되어 정말 쎈 친구들에게 다 맞춰주고만 있지는 않을까 싶어요. 실제로 공격적인 혜윤이의 속마음은 정말 여리고 소심하고, 속된 말로 순간 혜윤이는 쫄거든요. 가정에서 그럴 땐 누구나 실수하니까 깔끔하고 가볍게 '어! 미안해.'하고 인정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해주세요. 저는 교실에서 '친절한 혜윤이'라고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해요."
한 학기 동안 함께 생활했다는 명분으로 학부모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지금 아이가 겪는 어려움의 원인을 나는 무엇으로 보았는지, 그 어려움은 아이가 가진 어떤 행동과 생각, 정서로 인한 것인지 내 나름으로 관찰하고 해석한 생각들이었다. 다행히 학부모들은 내가 관찰하고 판단한 내용들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나의 시간, 학부모의 시간. 그 귀한 시간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단 한 명만 본다. 그 어린이. 절대로 고유한 'the 어린이'. 그렇게 상담의 시간 동안 우리는 원팀이었다.
제법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오후, 컴퓨터를 황급히 끄고 이제 두 번째 오버랩이 시작된다. 이제 나도 학부모. 담임교사랍시고 이러쿵저러쿵 다 안다는 듯 생각을 말로 쏟아냈던 나는 이제 교실문을 잠그고 다른 교실로 향한다. 운전을 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이 학교의 교문에 들어서 주차를 하고 헥헥거리며 3층을 오른다. 긴장의 마음이 다리로 옮겨갔나 보다. 아이코 3층까지 올라가느라 숨차고 힘이 들어 고사이에 긴장이 조금 누그러진다. 아이의 교실에 도착하니 앞선 상담이 진행 중이다. 복도에 서서 기다리며 나는 무엇을 물어보아야 할지 질문과 고민을 가다듬는다.
교사의 경우 자녀의 선생님에게 자신이 교사인지 먼저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고 굳이 밝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안면이 있거나 지인의 지인인 경우는 먼저 밝히면서도 서로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호칭하며 어렵게 지내기도 한다. 담임을 맡은 지인끼리는 해당 일 년 동안 만나지도 않는 모습도 보인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일단 나는 아는 사람이 없다. 친구들에게 북한에서 왔냐는 말을 듣곤 하는 나는 내가 알면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곤 한다. 자연스럽게 주윤이의 담임선생님 앞에서 나는 교사라는 내 역할도 잊는다. 나는 이 순간 완벽한 주윤이의 엄마이다.
학부모인 나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이가 학교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선생님에겐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지. 아! 하나는 안다. 주변정리를 잘 못하는 것. 지난주에 아이와 대화를 하다 주윤이는 나에게 딱 걸렸다.
"엄마, 반에 모둠이 5개가 있거든요. 근데.."
"주윤아, 너희 반이 28명인데, 어떻게 모둠이 5개야? 4명씩 7개여야 하잖아."
"아! 8명은 모둠이 없어요."
"어? 그러면 주윤이 넌 몇 모둠이야?"
"저요? 저.. 는. 모둠이 없어요."
하......! 촉이 왔다. 삐리리! 엑시던트 엑시던트! 뭐가 잘 못되었다. 우리 아들, 교실에서 특별관리 대상이고 그런 거..였니? 맙소사.
"제가 자리정리를 잘 못해서 거기 앉는데. 걱정 말아요. 우리 반에서 경제활동으로 화폐를 모으잖아요. 공책정리랑 독후감을 써서 지금 좀 돈을 모았어요. 자리경매할 때 자리 살 거예요."
"알았어. 독후감 2개씩 써야겠다. 그치! 원래 부동산이 젤 비싼 거야. 해봐."
교실에 외딴섬 8개 중에 우리 아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역시 아들은 제 세상을 살고 있었다. 어쩔 수 있나. 열심히 독후감 노트를 들이대는 수밖에. 어제도 상담을 간다는 나에게 아들은 한 마디를 한다.
"엄마 내일 학교 상담가. 선생님 만날 건데, 주윤이 하고 싶은 말 있어?"
"음, 엄마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일단 주변정리 안 되는 거랑 수업시간에 집중을 잘 못하는 건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거니까요."
"그 두 가지야 엄마도 알지. 다른 게 또 나오면 당황하겠지."
열 살의 당부와 조언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왔지만 그와 별개로 낯선 아이의 학교생활을 만날까 봐, 내가 아이에 대해 가진 고민이 여전할까 봐, 내 예상을 넘어서는 학교생활을 학교생활을 만날까 긴장이 되었다.
"아하하. 2학기부터 경제교육을 시작하는데 포인트를 쌓아서 자리경매도 그 일환입니다. 일단 앉아있는 자리에서 중앙 쪽 5모둠을 구성하고, 양쪽 가에 있던 학생들이 개별자리를 갖게 된 겁니다. 누구는 모둠이고 누구는 개별자리인 게 명분이 없어서 일단 이유를 하나씩 말해준 건데 큰 의미는 없습니다. 공교롭게 그때 책상 위가 좀 정리가 안되긴 했었고요. 어느 자리가 더 인기가 있을지 예상은 못했는데, 일단은 모둠자리가 더 인기가 많아 경쟁이 붙더라구요."
"네, 선생님. 주윤이가 주변정리가 잘 안 되는 걸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가 하나이다 보니 제 손이 들어가는 게 힘들지 않아서 제가 많이 치워주고 챙겨주었거든요. 제 힘으로 할 수 있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이의 생활습관이 우려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가정에서는 괜찮았던 내 도움이 학교에서 제 손으로 제 일을 자율적으로 해내야 하는 주윤이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마음속 숙제 하나를 쌓는다.
"주윤이가 영어를 참 잘하더라구요. 영어 선생님께서도 분명 주윤이가 영어권에서 살다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발음이 좋다면서 그 점을 참 궁금해하시더라구요."
"주윤이가 어떤 한 분야에 꽂히면 파고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릴 때 영어에 꽂혔던 적이 있어요. 그 당시엔 영어가 신기한 세상이었나 봐요. 종일 영어로 생활하던 때도 있었어요. 그 여파인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주윤이는 한 분야를 파고들고 탐구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변 상황을 살피지 못하는 모습도 간혹 보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그런 모습이 간혹 친구나 선생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보입니다. 차라리 주윤이가 처음부터 주변사람들에게 '난 한 군데에 집중하면 주변에 신경을 못 쓰는 면이 있어. 혹시 그러면 알려줘. 널 무시해서가 아니야.'라고 먼저 말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선생님. 그래야겠네요. 먼저 자신을 설명하도록 주윤이에게 말해보겠습니다."
"주윤이는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게 물리적인 만들기 뿐만 아니라 생각을 만드는 것도 만드는 것, 생산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윤이는 그 힘이 있어요. 독후감을 써온 내용을 보면 주윤이의 깊은 생각이 느껴지고, 저도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윤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그림과 글을 써서 책으로 만들어본다던지 하는 활동으로 주윤이가 가진 생각을 만들어가는 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생각을 만든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감탄의 전구가 반짝 켜졌다. 내 아이에 대한 방향을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만이 그 전부가 아니었다. 한 개인으로서, 좋은 책을 읽을 때 내 마음을 흔든 문장에 밑줄을 긋듯 나는 선생님께서 해주신 그 문장에 따옴표를 큼지막하게 끄집어내어 그 문장을 꽉 잡았다. 어쩌면 내가 주윤이를 기르며 이정표가 될 것만 같다. 나는 생각을 만드는 주윤이를 보고 싶어 졌다. 그 과정을 뒤에서 지켜봐 주는 엄마가 되어보고 싶었다. 그 과정이 기대가 되어 나는 설레어버렸다. 그렇게 기대되는 숙제 하나 추가.
의미 있는 시간과 말씀을 내어주신 담임선생님께 나는 배꼽손을 하고 깊게 허리를 숙이며 교실을 나섰다. 마음속에 숙제를 담고 나오는 내 마음이 일렁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그동안 살던 모양으로 살며 그 모양으로 주윤이를 기를 것이다. 그 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함을 나는 안다.
그중에 잘하고 있는 것도 있고 모자란 부분도 있고 때론 그릇된 부분도 있다. 이건 나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면이었다. 좋은 책을 읽혀주기 위해 매주 도서관에서 과학, 수학, 역사, 세계사, 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대출해 주는 일은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이다. 다만 주윤이 없이 내가 간다. 주윤이가 벗어둔 옷을 '이놈의 시끼~또 여기에 놨네.'하고 농담하며 내 손으로 세탁실에 두고 온다. 어렵지 않다는 이유로 주윤이가 제 손으로 제 일을 하는 시간을 외동엄마는 주지 않는다. 이건 내가 모자란 부분이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잘하고 있는 면과 모자란 점을 모두 읽어주셨다. 알고 있는 면을 확인받는 일은 '그래도 내가 잘하고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의 밀물과 '알고 있었지만 들켜버렸네' 하는 민망함과 반성의 썰물의 연속된 일렁임으로 변덕스러운 마음을 채웠다. 다만, 모자란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조언에 귀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모자란 부분을 알려주는 귀한 기회를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으리라. 지금이 모자란 부분이 자랄 수 있는 기회일 테니. 그렇게 나아져왔으니.
동시에 나는 '생각을 만드는 시간'을 꿈꾼다. 수첩에 공기의 성분을 원그래프로 그리던, 친구와의 비밀노트에 자신들의 만화를 만들어내며 낄낄거렸던 주윤이를 떠올린다. 그런 주윤이를 기쁘게 화답해 주리라. 네 모양을 네가 접어가고 펼쳐갈 수 있게 지켜보리라. 때론 '이렇게 해봐.'하고 새로운 제안을 해본다면 더욱 좋겠지만 내가 그럴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는 좀 더 내가 더 커봐야겠지 싶다. 다만 한 가지를 말해주리라.
"엄마말을 다 안 들어도 돼. 어떤 분야는 엄마가 잘 아는데, 새로운 세상은 엄마가 더 잘 몰라. 그땐 네 생각대로 해."
집에 돌아오는 길, 직진도 하고 빨간 신호에 걸리기도 하고, 우회전도 하고 좌회전도 하는 순간들이 내 오늘의 순간들과 겹친다. 내 교실에 앉아서는 우리 반 어린이들의 행동과 생각을 읽고, 나름 판단을 하고 조언도 했던 내가, 내 아이의 모습이라는 빨간 불 앞에 여지없이 멈추고, 엄마로서 커브를 돌듯 담임선생님 앞에선 학교 속 주윤이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듣고 또 기억하려고 눈을 똥그랗게 떠서 선생님의 시선에 눈을 맞추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던 나를 떠올린다. 짐짓 다 안다는 듯 잘난척했던 내가 해맑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을 우리 반 학부모들이 봤으면 참 재미있었겠지 싶다.
아마 그 생경한 모습 앞에서 우리는 느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 앞에선 한없이 약하고 겸손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기대하고 다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아름다운 계절, 서로의 귀한 시간을 내어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이 갖는 무게를 다시 한번 느낀다. 오늘은 그 무게가 무겁지만은 않다. 다만 서로의 걱정은 따듯해서 우리의 어린이들에 가 닿을 것이 만져진다. 교사도, 학부모도,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우리는 오늘 원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