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심리
수업시간에 24개의 개별적인 우주들은 꼼지락거리느라 바쁘다. 납작한 의자에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어느 누구 서 있거나 돌아다니는 어린이는 없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교실에서 어린이들은 각자 제 자리에 앉아 나의 설명을 경청하고 제 생각의 근육을 스트레칭한다. 유연하게 바로 따라 하는 어린이도, 호흡을 다시 가르쳐줘야 하는 어린이도, 나름의 노하우로 바른 자세로 코어를 유지하며 배움의 들숨과 제 생각의 날숨의 균형을 맞추는 어린이도 있다. 각자의 어린이는 같은 지도 아래 각자의 몸과 생각으로 제 모양의 생각을 빚어내느라 땀도 흘리고 살짝 딴짓도 하고 언제 끝나나 시계도 보고 활동에 쏙 몰입하기도 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나름의 사부작 거리는 시간이 안온하게 유지되는 건 수업시간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안전과 평화의 포근한 품 안에 있을 때에야 생각이 자란다. 나로 살고자 하는 꿈이 생긴다.
교실은 안전하고 편안해야 한다. 매슬로우는 욕구위계이론에서 결핍욕구인 안전 욕구와 소속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성장욕구인 배우고자 하는 욕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구, 그리고 최상위 욕구인 나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불러일으켜짐을 밝혔다. 내 배움이 두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교실이 있다는 것은 나로 살 수 있는 삶의 티켓을 가진 것이다. 언제고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손톱을 뜯어야 하는 무임승차가 아니다. 언제고 폭력이 나를 덮칠지 모르는 위험상태가 아니다. 내 자리가 있는 교실에서 어린이는 당당하게 제 생각을 빚는다. 평화로운 교실에서 오늘도 두 발을 쭉 뻗는다. 스스로를 키운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푸념을 하는 어린이도 교실문은 스스로 연다. 단호한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안에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또렷한 내 자리가 있다는 것. 비록 몇 년째 써서 해지고 덜거덕 거리는 책걸상이지만 세월의 흔적은 변하지 않았다는 안정감을 준다. 올해는 내 흔적이 고스란히 남을 테다. 내년의 어린이도 이 책상에 앉을 것이란 데 의심은 없다. 교실은 그렇게 늘 뒤에 남아있는 존재이다.
저기 비워진 자리는 명백한 내 자리여서 나만 채울 수 있다는 당위의 힘은 세다. 덕분에 어린이들은 오늘도 등굣길 아침마다 딴짓의 세계를 마음껏 서성일 수 있다. 길거리에 떨어진 가을 나뭇잎도 한번 쳐다보고, 신발장에서 친구를 만나 놀리고, 계단을 언제보다 천천히 올라 교실에 온다. 딴짓을 잔뜩 해도 괜찮다. 교실에 가면 내 자리가 있으니까. 내가 안 가면 하루종일 비어있을 그 자리는 내 것이니까. 행여 늦게 가서 내 자리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이런 매일은 매우 다행이지만 어린이에겐 자연스러운 아침이다. 교실 안 제 자리에서 두발 쭉 뻗고 아무렇지도 않은 보통의 서로를 만난다. 매일이 다행인 하루를 당연하다는 듯 시작한다. 어른은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오늘을 위해 오늘도 애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해나가며 어린이의 당연한 하루를 만든다.
몸과 마음이 안전한 교실에서 어린이들은 오늘도 단단한 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살살 제 손으로 깎아간다. 어떤 모양이 나올지는 어린이도 나도 모른다. 매 시간이 새로운 교실은 도무지 궁금한 세상일 수밖에! 고운 말 표어 만들기를 하느라 찌푸려진 미간과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의 잔잔한 bgm이 교실에 소곤소곤 가라앉아있다. 연필은 종이를 간질이고 사각거리는 소리는 마음을, 어린이의 생각을 간질인다. 기다랗고 단단한 연필을 꽉 쥔 말랑말랑한 손과 생각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찌릿찌릿한 생각의 신호가 오고 갈 때마다 한 글자씩이 더해진다. 생각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생각이 눈에 보인다. 어린이들은 제 생각이 담긴 문장을 보며 제 생각을 눈으로 감각한다.
“예쁜 마음은 고운 말에 담아주세요.”
“가을엔 불조심, 화날 땐 말조심!”
그럼 그럼. 하며 뒷짐을 지고 표어를 보다가 무심결에 다음 차례 표어에 멈출 수밖에.
“나쁜 말 하면 선생님 오고, 고운 말 하면 친구 온다. “
“
풉. 연우야, 내가 네게 이런 이미지였구나. 이번 단원에서는 ‘선생님 오시고’라고 해야 맞는데, 라임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눈감아 준다. 웃기면 장땡이니까. 어린이들의 생각이 내 마음에 닿아 내 마음이 간질거린다. 매 교시마다 성취를 감각할 수 있는 일이 내 일이란 생각에 새삼 기뻐진다.
어린이들은 매일 거짓말을 하곤 하는데 매시간마다 딱 걸릴 거짓말들이다. 매번 공부하기 싫다고, 수업하기 싫다고 잔뜩 말해놓고 막상 수업시간이 되면 교과서를 펴고, 노트정리를 하고, 산출물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열심히 한다. 쫙 펼친 손가락을 천장이 닿을 만큼 들며 발표하겠다고 팔을 든다. 표어 만들기를 한다고 했더니
“선생님! 주변에 색칠해도 돼요?”
“글자를 한 글자씩 색칠해도 돼요?”
“선생님, 표어를 일부러 기울여 붙여서 멋 내도 돼요?”
정말 대단한 거짓말쟁이들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나는 예스 티쳐가 된다. 다 해도 된다고, 네 손과 머리의 생각을 몽땅 표현하는 게 수업이 가진 목표이고 소망이고 소원이라고 말한다. 교실에 모둠별로 마련된 마커도, 색연필도, 유성매직도, 학습지도 다 너희의 생각을 보고 싶어서 안달 난 세상과 선생님이 준비한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잔잔하게 말한다. 교실에선 제 손으로 생각을 깎고, 생각의 모양을 빚어내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교실이 존재하는 당위는 여기에서 온다고 믿으니까. 여기는 그걸 위해 만든 학교이고 교실이고, 내가 있는 이유가 되는 곳이니까.
누구는 빨리 모양을 만들어 전시하고, 누구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개인차는 당연하다. 개인차는 속도이기도 하고 고유한 어린이가 보여주는 알록달록한 다양성이기도 하다. 다만 개인차를 아우르는 한 가지, 어린이가 해낸 진심의 산출물에는 오늘의 어린이가 있다. 문장 쓰기를 어려워하던 준서의 노트에 이제 문장이 보인다. 30년 후 나는 유퀴즈에 어떤 일로 나오게 될까?라는 주제의 글에 준서는 볼링선수가 되어서 나오겠단다. 요즘 부쩍 볼링에 빠져있는 문장을 보니 준서의 투명함에 웃음이 난다. 동시에 1학기에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지 못했던 준서가 떠오른다. 일 년 동안의 주제글쓰기 활동을 할 때, 어떻게든 한 문장이라도 써냈던 준서는 이제 자신의 서사를 쌓는 어린이가 되었다. 오늘의 내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는 준서가 되었다. 도무지 읽지 않던 책이었는데도 인생 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손을 번쩍 든다.
"해리포터요!"
"우와~준서 책도 읽어? 준서야 진짜?"
"그럼~여기 있어!"
친구들의 놀람에 준서가 책상 서랍에서 해리포터 책을 꺼낸다. 그 손의 단단함은 준서의 마음에서 전달된 게 맞다. 녀석, 많이 컸다. 글과 낯설었던 그때의 준서는 귀여웠고 오늘의 준서는 늠름하다.
학교에서 어린이들의 늠름한 성취를 보고 나면 나는 답답한 엄마가 되곤 한다. 집과 학교도 구분 못하는 생각 짧은 엄마.
“주윤, 이거 15분이면 쓸 수 있어. 얼른 다 하고 놀면 돼. 시작! “
우리 집 열 살을 책상에 앉혔으니 절반은 했다. 학교 독후감 숙제를 펼쳐놓고 독서록을 다 썼을 때의 온갖 장밋빛 미래를 늘어놓는다. 빨리 쓰면 자유시간에 책도 볼 수 있고, 놀이방에 가서 놀 수도 있고 참말로 좋은 것만 가득하다. 너를 위해 얼른 해내거라.
“엄마! 어떻게 이걸 15분 만에 해요. 더 걸리지요.”
“아니야, 엄마 반에 학생들은 이거 10분이나 15분이면 다 해.”
“엄마, 말도 안 돼요.”
이 순간 정말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나다. 정말로 우리 반 교실에서 어린이들은 15분이면 15줄은 다 쓴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반 어린이도 하기 싫다고 하고 우리 집 10살도 하기 싫다고 한다. 우리 반 어린이들도 우리 집 10살도 안전하고 편안한 제 자리에서 글을 쓴다. 다만 다른 것은 거긴 학교고, 여긴 집이라는 것? 나는 우리 반 어린이들 앞에는 똑똑이 선생님으로 서 있고, 우리 집 열 살 앞에선 빈틈투성이어서 이미 밑 보인 엄마로 서있다는 것? 따라잡을 수 없는 그 큰 낙차를 그제야 실감한다. 동시에 나름 사회생활을 하느라 애쓰는 교실 속 어린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볼멘소리에 한숨 몇 번을 거나하게 내쉬던 열 살도 이제 연필을 든다. 우리 집에서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와 만난다. 종이가 간질간질해질 때마다 검은색의 글자가 놓인다. 15분이 한참 지나 30분이 다 되어간다.
“그만 써도 되지 않아?”
“엄마, 조금 더 쓸 애기가 있어요.”
“근데 그러면 놀 시간이 없잖아.”
“엄마, 있어봐요. 근데 종이가 부족해요. 더 붙여주세요. “
그렇게 쓰기 싫다더니 우리 집 열 살도 종이를 더 찾는다. 나는 a4 한 장과 30cm 자, 볼펜을 가져와 종이에 줄을 그어 독후감 학습지 한 장을 더 만들어준다. 열 살은 재미나게 요상스러운 글씨에 그림까지 그리기 시작한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빨리 끝내고 놀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퀴즈를 내는 걸로 독후감이 마무리된다.
“주윤이는 꼭 하기 싫다면서 막상 하면 진심으로 제대로 하더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 살은 제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내 격려의 말은 거실에 남아 벽이든 창문이든 아이의 빈 우유잔이든 어딘가에 담긴다. 그렇게 거실의 풍경 속에 내 말이 담겨 우리의 정서를 만든다. 가족의 마음을 만든다. 열 살이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열 살의 손과 마음에 진심을 다했던 시간은 선명히 남아있으리라.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어린이들은 오늘도 투정을 부린다. 하기 싫다고 말한다. 공부에 대한 부담스러운 불편함은 교실에서는 사회생활 하느라 좀 더 포기가 빠르고, 가정에서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좀 뻗어보느라 더 실감 나는 것이 다를 뿐. 그럼에도 어린이들은 일단 제 일에 들어서면 진심을 다한다. 제 말랑한 손에 딱딱한 연필을 쥐고 제 생각을 눈앞으로 가져오는 그 시간을 경험한다. 내 생각보다 더 나은 결과에 놀라기도 하고, 내 생각과는 다른 결과에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제 손으로 만들어낸 세상을 감각하며 어린이는 큰다. 자신들도 크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어른도 어린이가 언제 이렇게 컸나 뒤돌아보고 놀라게 된다.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하는 성장은 다행스러운 성장이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오늘도 어른은 애쓴다. 어린이가 두 발 쭉 뻗고 제 생각을 늘리고 생각의 근육 사이사이에 신선한 산소를 넣어줄 수 있도록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이 안은 안전하단다. 이 안에서 크게 뛰고 크게 그리고, 신나게 소리 지르고 노래하렴. 자잘한 정교함도 세심함도 키워보렴. 있지, 세상은 늘 네 생각이 궁금하단다.
오늘도 어린이 너희들은 쏟아지는 잠을 쫓아가며 무거운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고 학교에 왔을 테지.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신발장에서 친구를 만나며 잔뜩 얼어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해동이 되기도 했겠지. 막상 교실에 올라오니 내 자리가 있다는 당연함, 친구들이 있다는 번잡스러움, 몰아치는 수업시간에 언제인지 모르게 정신 차리고 보니 손을 들고 발표를 하고 있었겠지. 단단한 연필에 제 생각을 실어 흰 종이에 사각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자연스럽다 생각했을 거야. 그러면서 큰단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양치기 어린이가 되었네. 하기 싫지만 오늘도 잘해버린 하루를 보낸 어린이,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