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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금오도를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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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하늘빛을 배경 삼아 너그러운 봄햇살이 내리면 연둣빛 신록이 하늘빛과 마른 숲을 간질거리며 피어나는 계절, 사월이다. 연둣빛 신록은 어린이의 웃음처럼 살랑이는 가벼운 바람에도 여기서 까르르 저기서 까르르 몰려다니며 노닌다. 봄햇살에 반짝이는 신록의 연둣빛 윤슬을 볼 때서야 올 한 해가 기대된다.



아름다운 사월에 남해의 섬으로 떠난다. 들떠있는 풋내 나는 연둣빛 신록을 투명한 푸른 바다가 너그러이 품어주는 봄의 금오도. 바다향 머금은 짭조름한 돌명게, 오독오독 바다맛 해삼에 샴페인을 한 잔 해야지. 일찌감치 준비한 샴페인 한 병을 들고 봄의 햇살에 연두도 하늘빛도 조잘대며 반짝이는 사월의 아름다움으로 들어간다.



여수의 남단, 신기항에 도착해 배에 차를 싣고 20여분을 항해한다. 열한 살은 곧장 계단을 올라 갑판으로 향한다. 그 발걸음의 노련함에 웃음이 난다. 일 년간 벌써 3번째 금오도이다. 눈이 시린 새 파랑과 윤기를 머금은 초록이 빛나는 선명한 여름. 내 눈앞에 반짝이는 선명한 여름의 아름다움에 눈길 한번, 또 한 번. 영원할 것처럼 열렬한 에너지를 쏟아내고 쇠약해지며 아스라이 저무는 여름의 노을을 마주하며 느끼는 애잔한 아름다움. 까바의 상쾌한 버블에 날려버리는 여름의 열기.



분명하다. 한 번 금오도에 매료된 사람은 한 번만 올 수는 없는 일. 다음 계절에 다시 금오도를 오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보고 싶으니까.



가을의 금오도는 너그러워져 있었다. 잔잔한 파도 안에 몸을 맡길 때 내 몸에 남긴 간지러운 금빛 물결, 재미 삼아 던진 통발에 담겨있던 문어. 송골송골 땀이 맺힐 때가 되면 와락 상쾌한 바람과 절벽의 바다를 펼쳐주었던 비렁길까지.



금오도를 떠나오면 늘 다음 계절의 금오도를 준비하게 된다. 금오도의 사계절은 같아서 아름답고 다른 빛깔로 아름다울 테니. 그러면 가야지. 봄의 금오도로. 좋아하는 마음을 담고. 확실한 아름다움으로.



금오도 바다를 가는 길에 운이 좋으면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를 볼 수 있다. 여름에 처음 배를 탔을 때 모르고 지나가버린 즐거움인 상괭이. 이번엔 꼭 보고 싶다는 단단한 소망을 담고 일찌감치 갑판에 섰다. 경험이 있다는 것,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세심한 계획성이 부족한 나는 경험이 만들어준 자산에 기대어 산다. 경험한 만큼 이해하고 누리며 산다. 다행스러운 건 경험이란 녀석은 아무래도 물기가 가득한 수채화인모양이다. 새로운 경험에 두 발을 디디면 그 주변으로 면적이 쫘악 번진다. 내가 이전에 가졌던 경험들과도 색이 잘 섞여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늘 해보고 볼 일이다. 나는 오늘도 경험한 만큼 이해하고 누리며 산다. 경험할수록 내 삶의 아름다움이 더 섬세해진다.



"어! 저기 저기! 상괭이다!"

뚫어질 듯 바다만 보고 가는데 저 멀리서 상괭이의 검푸른 등이 반짝인다. 바다의 윤슬을 뚫고 나타난 검은 등허리가 이렇게 단단하게 맑을 수 있구나. 경험이 만들어준 기대가 현실이 된 순간. 마음에 작은 기쁨이 반짝인다. 보기 어려운 상괭이를 늘 볼 수 있어 고마운 남편과 아들과 함께 보게 되었다. 괜히 뭐든 다 잘 될 것만 같은 기분. 온 세상의 행운이 내 밤하늘에 다다닥 별이 되어 꽂힌 기분이 이런 걸까.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해서 숙소로 가는 길. 항구에서 파는 금오도의 연두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금오도의 방풍나물을 한 봉지 가득 샀다. 숙소에 가면 쌉쏘롬한 방풍에 부침가루 조물조물 조금만 버무려서 전을 부쳐먹어야지. 나오는데 그 옆에 머리가 큼지막한 달래가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 흙을 품은 금오도의 달래는 향이 더욱 진하다. 어쩔 수 있나. 달래도 한 봉지 가득. 양손에 금오도의 초록을 들었으니 봄이다.



이번에는 비렁길 4코스를 걷는다. 남해의 해안을 품은 봄의 숲을 걷는다.

"주윤아, 여기 봐! 여기 나무에 손톱만 한 연둣빛 싹이 났잖아! 아름답지! 연둣빛 꼬마전구가 또롱또롱 빛나는 것 같지 않아?"

"아! 엄마는 어떻게 이 싹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아름답잖아. 아름다우니까. 그렇지?"

걷는 길마다 눈앞에 손톱만 한 연둣빛이 딸랑딸랑 반짝인다. 발밑의 푹신한 봄의 흙도 걸음마다 제 갈색의 향을 뿜는다. 오래된 세월을 담은 진한 갈색의 나무에 피어난 새봄의 신록을 보며 생각한다. 오래된 나도 매해 새로운 싹을 틔워야지. 오래되었지만 순간을 새롭게 살아야지. 나는 더욱 진해지고 순간은 더욱 싱그러워져야지. 마흔의 생각을 다지며 걸어가면 이내 너른 바다가 와락 열린다. 푸른 바람이 불어 이마의 땀을 어루만져준다. 아름답다는 선명한 감각이 온몸을 간질인다. 나는 여기, 봄에 있다.


금오도 바다에서 난 해삼과 돌멍게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확실한 행복을 누리는 시간. 오늘을 위해 준비한 샴페인을 따고 봄의 해산물을 펼쳤다.

"돌멍게는 먹고 여기에 소주 넣어 먹는 거지?"

해삼에는 금오도의 짭조름한 바다가 오독오독 입체적인 질감으로 씹힌다. 바다의 청명한 맑음이 담긴 돌멍게를 호로록 먹고 남은 무정형의 빨간 속살. 맞아. 자연은 각기 제 모양으로 자연스럽지. 같은 색이 없고 같은 모양이 없지. 그게 자연스러운 거지.


경쾌한 금빛 샴페인의 탄산에 금오도의 초록 방풍나물, 빨강 돌멍게, 검푸른 해삼이 가볍게 휘발되어 간다. 눈앞에 놓인 금오도의 오늘. 연두와 푸른 바다가 여전히 반짝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봄의 금오도를 사랑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 계절의 금오도를 기약하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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