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내게도 있다. 시절인연을 넘어 여러 해의 턱을 넘는 동안 서로의 안녕을 나누는 사이. 새 계절이 오면 새 계절이 와서, 한 해가 저물면 한 해가 저물어서, 새 해가 오면 새 해가 와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평온을 바라는 마음을 나눈다.
운전을 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 최근에 목 디스크가 와서 운전 중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할 때 종잇장만큼의 반동에 얼마나 아팠는지, 친구의 직장 근처 가리비차돌짬뽕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이가 새로 다니게 된 학원에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우리 엄마의 김장김치를 나눠먹으니 초등학생시절 어린이날 고추를 갈러 식료품가게에 함께 심부름을 갔던 이야기를 꺼낸다. 시시한 농담과 너스레가 오갈 때마다 하루동안 묵직하게 눌려있던 목소리가 팔랑팔랑 차 안을 노닌다. 해야 할 일들에 납작하게 접혀있던 마음이 기지개를 켜고 편안한 하품을 내쉬며 보송보송해진다.
“지금 어디야?”
“언니, 저 지금 주윤이 데리러 학원 앞에 가려는 길이예요.”
“그렇지? 그러면 나랑 중간에서 만나자. 내가 냉이 김밥을 쌌거든. 재율이 간식으로 싼 건데, 지금 너 여기 왔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 더 쌌어.”
“어머! 언니! 귀한 집 김밥을!! 언니 영광이에요.”
자잘한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겨울 오후, 언니의 하얀 차창 너머로 하얀 종이봉투에 담긴 김밥 도시락을 건네받았다. 두 손바닥에 김밥 도시락의 은은한 온기가 전해진다. 갓 싼 귀한 김밥을 받다니.
“언니, 어쩜 김밥을 쌌어요.”
“응, 어디서 냉이김밥을 봤거든. 한번 해봤어. 혹시 가면서 차에서 먹을까 봐 젓가락도 하나. 넣었어. “
“그럼요, 언니. 참을 수 없죠.”
“어! 재율이 전화 온다. 끝났나 봐. 가야겠다.”
“네, 언니. 잘 먹을게요. 운전 조심해요!”
“응! 너두!”
집에 도착하자마자 종이봉투에서 꺼낸 도시락 뚜껑엔 보슬보슬 서리가 껴있다. 갓 지은 밥의 온기가 스며든 내 마음에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뚜껑을 열자마자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마음의 아지랑이에 윤기를 더한다. 귀한 냉이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추운 겨울 동안 안간힘을 쓰며 마른땅의 에너지를 끌어모은 냉이의 응축된 녹색의 향이 입안 전체에 울려 퍼진다. 내 올해도 비록 척박하더라도 에너지를 모아 향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준다. 마음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황홀한 일, 희망을 가지게 해주는 일이 맞다.
주윤이와 재율이가 세 살 때 주윤이 엄마로 재율이 엄마로 알게 된 우리였다. 기저귀 차고 만났던 두 아가들은 이제 11살이 되었고, 그 시간 동안 언니와 나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는 만나야 할 필요가 없지만 서로 연락을 하고 만난다.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지만 서로 좋았던 일을 나누곤 한다. 시간과 마음을 들여 서로의 안녕을 묻고, 바라고, 만난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모든 필요는 좋아하는 마음 앞에 필요가 없어지니까.
매일 교실문을 열면 친구가 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서로 시간과 마음을 들여야 관계가 이어진다. 좋아하는 지인에게 시간을 들이는 일은 자연스럽게도 되지만 때론 공을 들여볼 만하다. 내 시간과 그들의 시간이 맞닿아 함께 만나 작은 술잔을 부딪히고, 색색의 음식들 사이로 시시한 농담이 흐르는 시간 안에서 나는 가벼워진다. 웃음소리는 무게가 없어서 늘 가볍게 떠오르고 내 마음도 일상의 중력은 잊은 채 두둥실 떠오른다. 그것만으로 이미 근사한 시간이다.
오늘은 친구집에 간다. 나는 샴페인을 준비했고, 친구는 우니와 단새우를 준비했다. 두 친구는 서로 통한 듯 새해 선물로 똑같은 책갈피를 준비했다.
“소오오름!!”
그 순간 그 이야기가 세상의 전부였는데 만나고 오면 기억도 나지 않는 쓸데없고 쓸모없는 이야기에 잔뜩 웃었다. 이야기 속에 오늘의 너와 네가 흐른다. 일상의 돌팍을 간질이고 옆에 불쑥 난 풀들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며 흘러간다.
오늘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면 내일의 내 할 일들이 왜 괜찮아지는 걸까. 필요하고 유용한 것들은 그 필요와 유용성이 없어지면 힘을 잃는다. 하지만 무용한 것들은 본디 유용했던 적이 없었기에 잃을 것이 없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 담겨있을 뿐이다. 그 좋은 마음들이 내 납작한 하루들 사이사이에 물을 준다. 그럴 때 고랑마다 싹이 피어난다. 오늘은 냉이가 피어났다. 향이 더욱 황홀하다.